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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책소개/소설

by gyaree 2018. 3. 2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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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난해의 일이다. 정권이 바뀌면서 세상도 바뀌고 있다는 것을 페이스북에서 어떤 사진을 보면서 느꼈다. 무심코 클릭한 사진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졌다. 숨이 막혔다. 결국, 그 사진들을 다 보지 못하고 페이지를 닫을 수밖에 없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의 참상을 찍은 사진이 낱낱이 공개되었다. 정말 눈을 뜨고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일이 괴로웠다. 살면서 이토록 잔인한 사진을 본 기억이 없다. 그동안 감춰두었던 진실들, 꺼내어 밝힐 수 없었던 진실의 그 날.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야만 이런 진실이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 쇠파이프로 맞았는지 장총의 개머리판으로 맞았는지 두개골이 함몰한 어느 청년, 팔다리가 잘린 시신들, 복부 내장이 터진 시신들. 이런 시신들의 사진을 보면서 그날의 참극을 처음 알았다. 그동안 말로만 듣던 혹은 뉴스에서 앵커의 무감정한 목소리로만 듣던 그 날의 참상. 솔직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와는 관계없었던 일이니까. 그때 내 나이 고작 9살. 광주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2017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계엄군에게 아버지를 잃은 김소영 씨를 안아주는 대통령의 모습에 많은 대한민국 시민도 울컥했을 것이다. 나와 같이 그 시대, 그 장소에 없었던 이들도 아주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그날의 아픔을. 대통령의 품에 안기어 흐느끼며 우는 김소영 씨가 흘리는 눈물은 아마도 억울함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랜 시간 가슴속에 박힌 응어리를 풀어준 개운한 눈물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만났다. 그 날의 참상을 내가 보았던 페이스북의 사진보다도 더 가슴 아프게 표현한 작가의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더 가슴이 옥죄어 왔다. 글과 사진이 중첩되며 그 날의 참상은 더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아무 죄 없는 무고한 시민들, 그중에서도 특히나 미성년자들의 죽음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한 자들에게 욕밖에는 할 수 없었다. 

중학생 동호는 친구 정대를 찾아 헤매다가 은숙 누나, 선주 누나, 진수 형을 만나 그곳에서 죽어 들어오는 시신들의 신분을 장부에 정리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건 유가족들이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왜 애국가를 부르며,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는지 의아하다. 국가를 위해 죽은 사람들도 아닌데.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총기로 무장한 군인들의 총탄에 무고한 광주 시민들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죽어 나간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덮어주고 애국가를 불러주는 것. 이로써 이들의 시신이 그냥 도륙된 고깃덩어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했던 묵념과 최소한의 추도였다는 것.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한 광경이다. 이런 살육을 저지른 인간에게 작가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들의 꿈에라도 들어가 어른거리고 싶다고. 그들의 악몽에서 피 흐르는 눈을 볼 때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자기를 쐈냐고, 왜 죽였냐고. 그 날의 무고한 희생자들의 아픔을 제대로 대변하는 대목이라 말하고 싶다.

한강 작가의 글은 어떤 사진보다도 어떤 영상보다도 그 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달해준다. 그래서 더 아프게 느껴진다. 그 시대의 참상을 언어와 문자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다. 내가 그 날 그곳에 있는 느낌을 받는다.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오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참상

11페이지 / 어린 새

그중에서도 맨 끝 모서리에 있는 사람의 상태가 가장 나쁘다. 처음 네가 보았을 때 그녀는 십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반의 자그마한 여자였는데, 썩어가면서 이제는 성인 남자만큼 몸피가 커졌다. 딸이나 여동생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천을 걷어 보일 때마다 너는 부패의 속도에 놀란다. 여자의 이마부터 왼쪽 눈과 광대뼈와 턱, 맨살이 드러난 왼쪽 가슴과 옆구리에는 수차례 대검으로 그은 자상이 있다. 곤봉으로 맞은 듯한 오른쪽 두개골은 움푹 함몰돼 뇌수가 보인다. 눈에 띄는 그 상처들이 가장 먼저 썩었다. 타박상을 입은 상체의 피멍들이 뒤따라 부패했다.




페이지 13ㅜ / 어린 새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강당을 나서기 전에 너는 뒤돌아본다. 혼들은 어디에도 없다. 침묵하며 누워 있는 사람들과 지독한 시취뿐이다.




페이지 45 / 어린 새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검은 숨

페이지 57 / 검은 숨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오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페이지 62 / 검은 숨

그들이 트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어. 끝까지 지켜보라는 명령을 받은 듯, 일병과 병장 계급장을 단 군인 둘만 부동자세로 제자리에 남았어. 나는 그 어린 군인들을 향해 어른어른 내려갔어. 그들의 어깨와 목덜미 언저리로 번지며 앳된 얼굴들을 들여다봤어. 겁에 질린 검은 눈동자들 속에서 불타고 있는 우리들의 몸을 봤어.

우리들의 몸은 계속 불꽃을 뿜으며 타들어갔어. 장기들이 끓으며 오그라들었어. 간헐적으로 쉭쉭 뿜어져나오는 검은 연기는 우리들의 썩은 몸이 내쉬는 숨 같았어. 그 거친 숨이 잦아든 자리에 희끗한 뼈들이 드러났어. 뼈가 드러난 몸들의 혼은 어느샌가 멀어져, 더이상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았어. 그러니까 마침내 자유였어, 이제 우린 어디로든 갈 수 있었어.

어디로 갈까, 나는 자신에게 물었어.

누나한테 가자.

하지만 누나가 어디 있을까.

난 침착하고 싶었어. 탑 아래쪽에 쌓인 내 몸이 완전히 다 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어.

나를 죽인 그들에게 가자.

하지만 그들이 어디 있을까.





달은 밤의 눈동자

페이지 173 / 밤의 눈동자

오래전 동호와 은숙이 조그만 소리로 나누던 대화를 당신은 기억한다. 왜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느냐고, 애국가는 왜 부르는 거냐고 동호는 물었다. 은숙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페이지 189 / 꽃 핀 쪽으로

그날 해 질 녘에 느이 아부지 어깨를 짚고 절름절름 옥상에 올라갔다이. 난간에 기대서서 현수막을 길게 내리고 소리 질렀다이. 내 아들을 살려내라아.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죽이자아. 정수리까지 피가 뜨거워지게 소리 질렀다이. 경찰들이 비상계단으로 올라올 때까지, 나를 들쳐메고서 입원실 침대에 던져놓을 때까지 그렇게 소리 질렀다이.





페이지 190 / 꽃 핀 쪽으로

그저 겨울이 지나간게 봄이 오드마는. 봄이 오면 늘 그랬드키 나는 다시 미치고, 여름이면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을에 겨우 숨을 쉬었다이. 그러다 겨울에는 삭신이 얼었다이.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 다시 와도 땀이 안 나도록,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워졌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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