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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 나 남겨두고 혼자 떠나면 안 돼

일상

by gyaree 2017. 9. 1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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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 나 남겨두고 혼자 떠나면 안 돼

7월 28일. 아침부터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요즘 날씨는 오락가락. 아침에 비가 내렸다가도 점심 때면 파란 하늘이 나오는 변덕쟁이 날씨다. 점심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석촌호수 한 바퀴 돌다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


위가 동그란 우주선 모양의 빨간 모자에 하얀색 반소매, 남색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할머니. 바로 옆 오른쪽에서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할아버지. 지금은 비가 그쳤지만 언제 떨어질지 모를 변덕쟁이 날씨 때문에 할아버지의 오른손엔 우산이 들려있다. 언뜻 봐선 점심에 같이 산책  나온 노부부 같다. 꼭 잡은 두 손이 너무 사랑스러워 두 분을 앞지르지 않고 조금 뒤에서 바라보며 걸었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니 할머니의 자세가 뭔가 부자연스럽다. 반 발 앞서 걷는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따라가는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 구부정하게 앞으로 꺾어진 할머니의 상체.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한 걸음걸이는 할아버지가 끌고 가는 형국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엔 정다운 대화 한마디 없이 걷기만 할 뿐. 살가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즐기는 노년의 산책은 아니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천천히 따라가며 한동안 노부부의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몸은 건강해 보이는 할머니는 아마도 치매인 듯하다. 불현듯 나에게도 언젠가는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일부러 할머니 할아버지의 보폭에 맞추어 잠시 따라가며 상상해 본다.

몰래 찍어서 죄송합니다.



세월의 흔적일까. 검은 머리카락보다 흰색 머리카락이 머리 대부분을 덮은 적어도 일흔은 넘어 보인다. 아마도 두 분은 40년 이상은 한 이불을 덮고 살았을 것이다. 옛날이야 스물 전에도 결혼을 했으니 많게는 반백년을 부부의 삶을 함께 하지 않았을까. 자식들을 키우느라 정작 자신들의 몸은 살필 겨를이 없었을 세대. 나의 엄마 아버지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의 입에서 평소와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면? 아침에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까? 아마도 무섭다는 감정이 먼저 들 것 같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실험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부부 관계인 할머니 할아버지를 상대로 할머니가 치매가 온 것 같다는 사실을 남편에게 말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한 실험이었다. 이 실험에서 치매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할아버지들은 일순간 말을 잊지 못했다. 잠시 무언의 시간이 흐르고 눈에선 물방울이 매치는 듯. 아내에게 당혹스럽고 침울한 얼굴을 들키지나 않을까 억지로 참아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아내에게 해준다. 순간 나의 가슴속에서도 울컥거림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이 상황이 실험이란 걸 아는 할머니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는 남편의 한 마디에 몰래카메라 촬영은 가짜가 아니라 진심이 묻어나는 진짜라는 현실로 바뀌었다.

집안에 누군가 아픈 사람이 생기면 처음엔 병간호하느라 몸이 약해지고, 그 시간이 길어지면 서서히 서서히 마음마저 약해지지 않을까. 결국엔 누군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난다. 홀로 남겨진 사람의 쓸쓸함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겠지. 배우자가 떠난 옆자리. 모리사와 아키오의 작품 [당신에게]를 읽다가 눈물을 맺히게 했던 장면이 있다. 아내가 암에 걸려 먼저 세상을 떠난다. 항상 이불 하나를 깔고 같이 잤던 부부. 아내가 떠난 후 혼자 지새는 첫날. 홀로 이불을 깔고 자려고 누운 주인공. 이불 가운데에 편히 눕지 않고 한쪽 끝에 눕는다. 아내가 누웠던 자리를 남겨두고 한쪽에 누워서 잠을 청한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닌데, 아내의 빈자리를 침범하지 않는 주인공. 아내가 저 세상으로 떠난 바로 그날 저녁에 홀로 잠들 수 있을까? 반백년을 같이 덮고 잔 이불. 그 속의 따스한 아내의 온기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도 결혼을 하고 집에서 혼자 잠을 잔 적이 몇 차례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아내가 없는 집에서 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만 빼고 아이들 데리고 1박 2일로 놀러 갔던 날. 그날 저녁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몇 번이고 잠을 청했지만 이상하게 잠에 들지 못했다. 나 자신이 정말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잠을 이루지 못할까? 몇 번을 되뇌어 봐도 아내의 빈자리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자다가 문득 눈이 뜨였을 때 옆에 아내가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내가 참 신기하기도 하고 부부라는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였다. 결혼 전엔 집에 부모님이 없어도 혼자서 잘도 자던 잠. 결혼 후 아내와 산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다. 지지고 볶고 싸우기도 하고 말다툼하며 살아오는 동안 쌓인 애정. 이불에 누군가가 옆에 없는 것이 큰 허전함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걷다가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손을 꼭 잡은 할아버지의 왼손. 아픈 아내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되돌리고자 매일매일 걸었을 그 길.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며 건강했을 때 걸었던 걸음은 아니어도 꼭 쥔 할아버지의 손은 할머니의 마음에도 전해지지 않을까. 할아버지의 왼손은 말하지 않지만 무언가 전해져 온다. TV 프로그램에서 했던 실험처럼 "아무 걱정하지 마!" 하고 외치는 듯하다. 


"살아만 있어. 내 옆에...." 

"아직은 혼자 이불을 덮기 싫다구. 할망구."


노부부를 따라간 시간은 3분이 채 안 된다. 그 짧은 시간 할아버지의 걸음은 그야말로 힘이 느껴졌다. 발걸음 하나하나에 할머니를 먼저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혼자 걷는 길이 아닌, 둘이 걷는 길. 나이 들어 머리 하얀 할아버지일 망정, 아픈 할머니를 끌고 갈 망정, 할아버지의 힘찬 걸음에 굳은 의지의 아우라가 보였다. 

항상 같이 걷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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