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고민' 하나쯤은 있다. 아니, 하나가 아니라 그 이상일 것이다. 고민하지 않는 인간은 인간일 수 없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어가며 고민거리도 바뀌기 마련이다. 고민이라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풀리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자기 혼자서는 절대 풀 수 없는 고민도 있다. 어릴 적 고민이라는 것은 친구들이 가진 것을 내가 갖지 못했을 때 오는 물건의 소유욕에 대한 고민이다. 대부분이 그러할 것이다. 좋은 장난감, 좋은 신발, 좋은 가방, 좋은 집안 환경 등등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많이 가지지 못한 양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런 1차원 적인 고민은 엄마 아빠에게 말만 하면 어느 정도 해결될 가능성이 크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중, 고등학생이 되면 1차원 적인 고민에서 벗어나 이성에 관한 고민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온다. 물론 이성에 관한 고민이야 나이가 들어도 죽 이어지는 건 마찬가지지만 이 시기엔 주로 공부와 이성에 관한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역시도 그랬고. 사람에 따라선 이성에 눈을 늦게 뜨는 타입도 있어 주로 공부가 고민거리로 자리 잡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이 시기에 이성과 공부에 관한 고민은 누가 풀어 줄 수 있을까? 이성은 엄마 아빠보다는 친구들이 책임지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반면 공부는 엄마 아빠의 경제력이 뒷받침된다면 부모의 힘을 빌려 해결될 가능성이 큰 것이 사실이다.
더 자라서 대학생이 되면 어떤 고민거리가 생길까?
일단은 맘껏 놀아보자는 심리가 모든 대학생에게 있을 것이다. 19년 동안 공부만 했으니 자유를 누리는 것은 어쩌면 마땅한 처사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고 나면 맘대로 노는 것도 저절로 쌓이는 고민 때문에 놀지도 못하게 된다. 사회인의 준비를 해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고민에 봉착하게 된다. 좋은 회사로 취직하기 위해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일찌감찌 공부를 포기하고 돈벌이에 나설 것인가. 아니면 그저 그런 회사에 취직해 그저 그런 대우와 월급을 받으며 살아갈 것인가. 여러 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많은 고민이 시작되는 시기다. 대한민국 1% 안에 들어가는 부모덕에 좋은 곳에 취업할 것인가. 이 시기의 고민은 부모가 해결해주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부모의 도움을 받는 사람도 있지만 점차 부모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민일 것이다. 아마도 인생의 첫 답답함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이제 어엿한 사회인 됐다. 과연 고민이 사라질까?
직장인이 되면 사람과의 관계가 제일 큰 고민거리로 다가온다. 물론 돈도 많이 벌어야겠지만, 인간관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떠나야 하는 일도 생긴다. 이 시기부터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관한 고민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인간관계를 잘 풀어 나가게 할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 오롯이 혼자서 헤쳐나가야 한다. 인간관계가 원만한 타입이라면 별문제 없이 즐거운 사회생활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고 본다.
나이가 들면 들 수록 고민은 더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며,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처럼 도저히 풀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 점을 보기도 하고, 타로 카페에서 카드를 고르고 있는 자신을 볼 때가 있다. 누구에도 말하지 못할 고민들. 이런 고민거리들을 해결해 줄 누군가를 찾아서 헤맨다.
'나미야 잡화점'의 나미야 할아버지는 특출한 능력자가 아니다. 단순히 불특정 사람들의 고민 편지를 받아 나름 충실히 답장을 써준다. 고민 상담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민거리를 들어주는 것만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렇지 않다. 나의 말하기 어려웠던 고민거리를 누군가는 풀어주길 원한다. 나의 고민을 듣고 있는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기만 해도 많은 감동과 진정 고마움을 느끼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진솔하게 들어주는 이가 있다면 어떨까? 나는 아직 살면서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없다. 하지만 언제라도 겹겹이 쌓인 이 많은 고민거리를 내던지고 싶을 때가 많다. 판타지 같은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미야 할아버지의 편지 답장을 한 번쯤은 받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끓어오른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상담자들은 자신의 고민에 대해 정확한 답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그저 답답한 마음을 할아버지에게 넋두리하듯 풀어낸다. 이미 답은 그들의 안에 가지고 있으며 내가 가진 답이 옳은 것인지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 이 세상 누가 사람들의 고민을 바로 해결해 줄 수 있을까? 단지 정성 어린 조언과 진솔하게 들어주기만 해도 된다는 것을.
나에게도 나미야 할아버지처럼 그 누군가에게 복잡하고 힘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다면.....
가쓰로는 현관으로 가지 않고 발소리를 죽여 그쪽으로 다가갔다. 유리창 안에 이중으로 달린 창호지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 틈새로 안을 살펴보았다.
그곳은 밤샘 독경을 했던 방이 아니라 관이 놓인 빈소였다. 앞쪽 제단에는 향불이 타고 있었다. 늘어선 철제 의자의 맨 앞자리에 아버지 모습이 보였다.
뭘 하시나 의아해하는 참에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곁에 놓인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하얀 천에 쌓인 물건이었다. 아버지는 관 옆으로 가더니 그 하얀 천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이 일순 번쩍 빛났다. 그 순간 가쓰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칼이었다. 오래된 칼. 그 칼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가쓰로는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많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생선 가게 '우오마쓰'를 처음 개업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써온 명품 칼. 아버지가 가게를 물려받기로 결정했을 때, 그 칼도 같이 건네주셨다고 한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그 칼로 생선 다루는 수업을 받았다.
아버지는 관 위에 하얀 천을 펼치고 거기에 칼을 내려 놓았다. 다시 한 번 영정 사진을 올려다보더니 고개 숙여 오래도록 합장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쓰로는 가슴이 뭉클했다. 아버지가 마음 속으로 할머니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죄를 하고 있을 터였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가게가 자기 대에서 끊겨버리게 된 것을. 하나뿐인 자식에게 소중한 유물인 그 칼을 건네주지 못한 것을.
가쓰로는 창문 옆을 떠나, 현관으로 가지 않고 그대로 마을회관을 나왔다.
음악을 아예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취미로 하면 좋잖아요. 분명히 말하는데 당신은 음악적 재능은 없어요. 당신 노래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거야 뻔한 일이죠. 벌써 삼 년씩이나 해봤는데도 아직 싹수가 보이지 않는다면서요. 그건 재능이 없다는 증거 아닙니까.
잘나가는 사람들 좀 보세요. 주목을 받기까지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아요. 특별한 빛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 알아봐주는 거예요. 그런데 당신을 알아봐준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그걸 인정해야죠.
예술가라는 말이 듣기 거북했어요? 그렇다면 감각도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네요. 아무튼 당신에게 절대로 해가 될 말이 아니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생선 가게로 돌아가세요.
"너는 아직도 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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