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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7일 제 3차 남북정상 회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장면]

일상

by gyaree 2018. 4. 3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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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 판문점 회담 [비포장 길]


삼일 동안 행복했다.

살면서 TV 화면을 카메라에 담아보기는 처음이다. 나도 모르게 행동이 앞섰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굳이 TV 속 화면을 담지 않아도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인터넷 뉴스의 고화질 사진을 다운로드해서 즐기면 되는 것을. 나의 무의식 속 뇌의 수많은 뉴런은 신호를 보냈다. 


"빨리 카메라로 안 찍고 뭐해?"  
"이런 건 너의 핸드폰에 담아두라고!"


하루 종일 TV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보상자라고 말하는 그 TV 속 화면에서 나오는 이미지 한 장 한 장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벅찼다.
흥분됐다.
기뻤다.
걱정됐다.
박수를 보냈다.


남과 북의 관계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다.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남북의 정상이 만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개개인에겐 아주 아주 사소로운 만남 하나를 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냥 만나서 얘기하는 것인데 왜 이리도 어렵고 힘들었을까. 



나는 반공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다. 

'때려잡자 공산당!' '무찌르자 공산당'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이승복)'


국민학교에서(초등학교) 정기적으로 이런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때가 되면 반 아이들은 어디론가 견학을 간다. 그곳에서 보던 그림은 북한은 무조건 나쁜 놈이고 짐승들이고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공산당 그러니까 북한 괴뢰군이 무서웠다. 무서운 존재로서 어린 나의 뇌 속에 자리 잡았다. 교실 뒷벽에는 공산당을 쳐부수자는 반공 포스터가 주기적으로 붙어 있었다. 그 시절 애니메이션도 그랬다. 북한의 김일성 얼굴을 돼지로 묘사해 사악한 공산당 수괴를 무찌르는 똘이 장군. 나는 어릴 때 김일성이 정말로 난폭한 돼지인 줄 알았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던 '이승복' 어린이의 이야기는 유명했다. 자연스럽게 동네에서 친구들 사이에도 이런 우스갯소리 유행어가 한 참 떠돌았다. "나는 콩사탕이 싫어요." 이 나라 사람들에게 북한은 감히 범접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의식을 심어놓았다. 당연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북한의 이미지는 '북괴' '나쁜 적' '빨갱이' '김일성은 돼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였다. 생각해보면 청소년기까지 이런 의식이 있었으니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얼마나 편했을까. 그냥 일방적인 사고만 가르치면 됐으니 말이다.

평화와 번영을 심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장면

이젠 나도 아이 둘의 아빠가 됐다. 4월 27일 하루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연 회담 당일 날 어떤 그림이 연출될 것인가. 두 정상이 만나서 어떤 결과를 표출할 것인가. 누군가는 '주적'이라 말하는 북한의 정상, 김정은과의 만남. 65년간 적이라는 울타리 속에 가두어 두었던 북한에서 최고 령도자라 일컫는 김정은과의 만남. 설렜다는 감정이 솔직한 나의 마음이다. 내가 대통령도 아닌데 너무 오버하는 건 아닌지, 일개 시민에 불과한 내가 무어라고. 솔직히 김정은의 얼굴이 아직까지는 '돼지'로 보이기도 하는, 그래서 오래돼 낡아 빠져 고착된 관념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마도 내 또래 사람들은 충분히 공감하리라고. 



무튼 날은 밝았고 역사적인 만남은 이루어졌다. 세계가 주시한 두 사람의 만남. 김정은 위원장이 우리 문재인 대통령의 손을 잡고 50센티미터 폭의 경계선을 넘어 북쪽으로 한 걸음 디딜 때는 프레스 센터에 모인 3천여 명의 내외신 기자들 사이에서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놀랐다. 남북한 사람들만 좋아한 것이 아닌,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었다는 사실. 선과 악의 구분을 떠나서 인간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평화' 이 두 글자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화면이 TV에서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많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공감대를 형성한 장면을 꼽으라면 '도보 다리 회담'이다. 두 배우의 말소리도 없는 화면은 30분을 넘게 지속됐다. 일반적인 방송 프로그램이라면 분명한 방송 사고다. 소리 없는 그림을 긴 시간 보는 것은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들리는 건 새소리뿐. 순간 복화술 전문가이고 싶었다. 과연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일상적인 잡담은 아닐 터인데. 김정은 위원장의 표정만 보이는 영상에서 정말 진솔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건 쉽게 알아차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두 정상 간의 회담이었지만 신뢰가 느껴졌다. 때로는 표정이 굳은 얼굴, 때로는 입꼬리가 올라가 미소 지은 얼굴. 소리 없는 영상이 이토록 재미있었던 적은 없었다. 30분이 아니라 한 시간, 두 시간을 했어도 질리지 않았을지도.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보다도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전 세계인이 주목한 이 두 장면보다도 나의 뇌를 강렬하게 자극한 그림은 따로 있다. 오전 1차 회담을 끝내고 통일각으로 돌아가는 김정은 위원장을 태운 차의 '주행길'이었다. 평화의 집을 빠져나온 차가 통일각으로 가기 위해서 선택한 길은 잘 닦인 도로가 아니었다. 파란색 건물 일명 'T'로 시작하는 건물 옆으로 나 있는 비포장 길이었다. 그쪽으로 차가 들어갈 거라고는 누가 예상했을까. 덜컹덜컹, 김정은 위원장을 태운 리무진 방탄 차량은 기우뚱하며 흙바닥을 지나 통일각으로 향했다. 이것이 남북 분단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했다. 평화의 집과 통일각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없는 듯했다. 김정은 위원장 차량의 운전수가 택한 길이라는 것이 비포장 흙바닥. 지금까지 남과 북에는 이 짧은 거리조차 잘 닦인 도로가 없었다는 것인가. 국가 원수를 태운 차량이 흙바닥 위를 달리는 장면에서 나는 알았다. 이게 지금까지의 현실이라는 것.

이번 회담에서 나는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단지 도로가 없었던 곳에 작은 도로 하나라도 생길 수 있다면. 그래서 다음 회담에는 잘 닦인 도로 위로 남북의 차량이 안전한 길을 달릴 수만 있다면. 길이 생기면 사람들의 발길은 이어진다. 68년 만의 종전 선언도 아주 큰 업적이고 축복받아야 마땅한 일이지만 아주 작은 길 하나는 다시 수만 갈래의 길이 태어나는 시작이라 생각한다. 나 같은 소시민은 거대한 건 바라지도 않는다. 


서로 오갈 수 있는 '길' 하나면 족하다. 이번 회담으로 김정은 위원장의 얼굴은 내 머릿속에서 더는 돼지가 아니길 바란다.      
 



남북 정상 공동 기념 식수



도보 다리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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