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인을 죽이기 위해 망원 렌즈의 초점을 맞추는 암살자. 그런데 왠지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망원경으로 노인을 관찰하다 어둠이 몰려와 결국 암살은 다음 날로 미룬다. 이런 첫 장면을 읽다 보면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한국 영화가 아닌 서양 영화에서나 자주 봐왔던 '스나이퍼'이다. 표적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긴 총구를 들이밀고 때를 기다리는 암살자. 첫 장면에서 이게 한국인가 싶을 정도로 낯설기도 하다.
왜 일까?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런 암살자를 주인공으로 다룬 작품이 적어서일 듯하다. 기껏해야 칼로 상대방을 찌르거나 주먹질 아니면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때려죽이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 래생은 조금은 다르다. 칼뿐 아니라 총기류, 폭탄을 다루는 솜씨가 전문가 수준이다. 어쨌든 시작은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이 연상된다.
래생은 설계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암살자이다. 그런 래생을 지휘하는 인물이 너구리 영감. 그리고 너구리 영감 위에는 의뢰인이 있다. 일감을 주는 클라이언트. 이 소설의 최상위 포식자인 의뢰인이다. 즉, 최고 권력자인 셈이다. 그들은 설계자(너구리 영감)에게 일감을 제공한다. 설계자는 의뢰인에게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용히 살인을 마무리 짓기 위해 계획한다. 깔끔한 일처리로 권력자에게 오랜 신뢰를 쌓아온 너구리 영감. 어느덧 청부 살인 업계에서 권력자로 굴림하게 되는데. 너구리 영감도 나이가 들어 점점 기세가 꺾여간다. 그 자리를 넘보는 래생의 라이벌이 등장한다. 이미 늙고 약해진 권력을 제거하고 새로운 세력을 만들려는 한자. 한자는 영감의 주변 인물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너구리 영감 밑에서 자란 래생과 한자. 이 세계에서도 권력의 유혹은 뿌리칠 수 없는 마약 같다. 한자는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신뢰 우정 진실 따위에는 연연하지 않는다. 영감이 시키는 대로 기계적으로 살인을 하던 래생. 드디어 그에게도 살인을 하는 이유가 생긴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죽인 한자를 제거하는 것.
이 작품에서 정말 인상에 남는 공간은 '푸주'다.
푸주가 사고팔지 않는 것은 연민 동정 울분 같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싸구려 정서와, 신념 사랑 신뢰 우정 진실처럼 우울하고 힘없는 단어들뿐이다. 푸주는 의리니 신용이니 하는 것들을 담보로 잡지 않는다. 담보는커녕 푸주는 인간의 마지막 밑바닥에 그런 아름다운 정서들이 자리잡고 있을 거라고 믿지도 않는다.
설계자, 암살자, 트래커가 살아가는 곳의 묘사는 정말로 압권이다. 연민 동정 울분 같은 것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곳. 의리니 신용이니 하는 것들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곳. 정말로 인간쓰레기들만 득실거리는 구역. 곰곰이 생각해보면 권력을 잡은 이 시대의 썩은 권력자들을 꼬집는 것이 아닐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못할 게 없는. 심지어 청부 살인까지도 저지르는 비뚤어진 사람이 '푸주'가 아닐까 한다.
끝으로, 너구리 영감은 말한다.
사람들은 나 같은 악인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악인은 지옥 같은 데 가지 않아. 여기가 바로 지옥이니까. 마음속에 한 점의 빛도 없이 매순간을 암흑 속에서 살아가는 게 지옥이지. 언제 표적이 될까, 언제 자객이 올까, 내내 두려움에 떨면서.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지옥인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살고 있는 게 바로 지옥이지.
악인은 지옥 같은 데 가지 않아. 여기가 바로 지옥이니까.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지옥인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살고 있는 게 바로 지옥이라고. 언제 표적이 될까, 자객이 언제 올까, 내내 두려움에 떨면서 사는 나날들. 바로 지금이 지옥이라는 것. 래생은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한참을 울던 할아버지는 향유고래를 향해 이렇게 소리쳤지. 고래야,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그동안 등짝에 작살 꽂고 다닌다고 많이 힘들었지? 너랑 헤어진 후에 나도 이놈의 고래잡이 진즉에 떼려치우고 싶었어. 너는 바다에 살아서 잘 모르겠지만 요즘 땅에서 사는 게 만만치 않아. 나 아직도 전셋집에 살아. 그리고 자식새끼들은 얼마나 처먹어대는지 들어가는 돈이 장난이 아냐. 하여간 살기가 팍팍해서 그랬어. 용서해줘. 다음에 만나면 대포나 한잔하자고. 술은 내가 들고 갈 테니까. 너는 대왕오징어나 한 마리 잡아와. 대왕오징어는 한 마리만 구워도 소주 열 박스는 마실 거니까. 미안해, 고래야. 네 등짝에 작살 꽂앙서 미안해. 내가 못난 놈이어서 정말 미안해. 엉엉엉"
"붉은 바람이 보여요. 푸른 사자들도 있고요. 그 옆에는 무지개 색깔의 앙증맞은 북극곰도 있고요. 저곳이 천국일까요?"
"네, 그곳은 천국이랍니다. 당신은 지금 천국으로 가고 있어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당신은 지옥에 갈 거예요."
"그럼 우린 다시 못 만나겠군요. 당신은 틀림없이 천국에 있을 테고 나는 틀림없이 지옥에 있을 테니까."
여자가 래생을 향해 피식 웃었다. 웃고 있는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산다는 건 그렇게 놀랍고 잔인하고 역겨운 것이다.
푸주가 사고팔지 않는 것은 연민 동정 울분같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싸구려 정서와, 신념 사랑 신뢰 우정 진실처럼 우울하고 힘없는 단어들뿐이다. 푸주는 의리니 신용이니 하는 것들을 담보로 잡지 않는다. 담보는커녕 푸주는 인간의 마지막 밑바닥에 그런 아름다운 정서들이 자리잡고 있을 거라고 믿지도 않는다.
표적을 죽이고 돌아오면 래생은 항상 무력감에 빠졌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다. 죄의식이라든지 자기 자신에 대한 불쾌감이나 혐오감이 드는 것이 아니라 무력감이 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다른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자신조차 책임질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를 죽여서 목숨을 이어가는 삶이 여름 산처럼 건강하고 생명력이 넘친다면 오히려 이상할 거라고 래생은 생각했다.
사람들은 나 같은 악인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악인은 지옥 같은 데 가지 않아. 여기가 바로 지옥이니까. 마음속에 한 점의 빛도 없이 매순간을 암흑 속에서 살아가는 게 지옥이지. 언제 표적이 될까, 언제 자객이 올까, 내내 두려움에 떨면서.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지옥인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살고 있는 게 바로 지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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