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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천 밤길, 달은 말했다. 걷는 아저씨, 29일

일상/하루하루

by gyaree 2019. 6. 12.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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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16 / 14,575보

 


 

양재천 밤길, 달은 말했다.

달과 함께 가는 저녁 / 양재천 영동 3교 도곡 개포 우성 4차 아파트 6동 옆

 

"무섭지 않다고. 무섭지 않으니까 걸어도 돼. 밤에 이곳으로 나와보라고. 내가 너의 가는 길을 밝게 해 줄게."

 

달은 그렇게 속삭였다.     

 

양재천의 저녁. 아니, 밤.

 

양재천에 인구 밀집도가 갑자기 상승했다면, 그것은 저녁이 왔다는 뜻이다. 기온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양재천 산책로는 더더욱 그렇다. 낮에는 나무 그림자, 저녁은 그 위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포개진다. 거칠고 밋밋했던 아스팔트 바닥이 캔버스에 그려놓은 그림처럼 그림자로 뒤덮이고 한낮에 태양열로 충전된 가로등은 해가 떨어진 저녁에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텅텅 비어 있던 아침의 산책로는 가로등이 켜지면서 사람들의 그림자를 아로새기며 한 폭의 그림판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양재천의 밤은 아침보다 낮보다 화려하다. 사람들은 걷거나 뛰거나 타거나 하면서 양재천으로 입장한다. 이 밤을 즐기기 위해 비싼 티켓은 필요 없다. 튼튼한 다리도, 아픈 다리도, 휠체어도 모두에게 열려 있다. 들어오는 입구는 모두가 제각각이지만 그들은 한데로 모인다. 제대로 운동복을 갖춰 입은 이가 있는가 하면 회사 출근복 그대로인 아저씨도 있다. 이곳은 복장의 제한도 없다. 양복 차림이든 멋진 블라우스에 치마를 입은 사람이든 자유롭게 걷는다. 바로 옆으로 독한 마음을 품고 살을 빼겠다는 의지로 뛰어가는 사람도 있다. 애완견을 끌고 산책하는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이라도 그들의 애완견 때문에 길 한가운데서 멈추기도 한다. 이 밤길에 일면 부지의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담당하는 강아지들. 동물들은 아무 거리낌이 없다. 서로의 냄새를 맡으며 확인하고 가까이 다가간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상상해보라. 처음 보는 사람이 눈 깃을 흘깃거리며 다가온다면 어떨지. 아마도 도망가나 미친놈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애완견과 같이 나오면 상황은 다르게 변한다. 그들은 서로의 애완견 덕분에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강아지가 했던 것처럼 가까이 다가선다. 아름다운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나무 아래에서 마음의 문을 연다. 이렇듯 양재천의 밤 산책로는 강아지들에게도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있던 답답함을 털어주며 그 주인에게도 생각지 않은 행복한 시간을 선사한다. 

 

컴컴한 저녁에 이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그렇게 여유로울 수 없다. 바쁜 삶에 쫓겨 피곤함에 전 사람이 아닌 무언가 여유가 있어 보이는 얼굴로 보인다. 힘들게 산 하루의 피로를 풀기 위해 걷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자신들의 건강한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이곳으로 나온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함이 아닐까. 죽을힘을 다해 뛰지 않는다. 느리게 느리게 여유있게. 발에 적당한 힘을 주고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며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걸어간다. 걷다가 힘들면 수변 공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음악을 듣거나 핸드폰을 보거나 하면서. 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헬스클럽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헬스클럽이 '운동'에 방점을 둔다면 양재천 밤길은 '휴식'이라고 하고 싶다. 여유로운 밤의 휴식처. 양재천 밤길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컴컴한 밤에 거기를 왜 가? 무섭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분명히 밤은 컴컴하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든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밤이 컴컴하다는 사실. 그러나 이곳은 생각처럼 무섭지 않다. 무더운 날, 저녁에 나와보라. 걷기 귀찮을 만큼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물론 인파가 적은 장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음침하거나 그런 길은 없다.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남녀.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려는 어르신들. 운동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몸매를 자랑하는 사람들. 저녁 늦게 학원이 끝나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청년들. 친구들과 먹을 것을 들고 와서 자리 깔고 앉아 떠드는 고등학생 무리. 다정하게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부부. 마라톤 연습을 하는 건지 팀을 꾸려 쉬지 않고 뛰는 사람들. 이곳저곳에서 "멍멍" "멍멍" 무서운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가로등 불빛과 사람들의 핸드폰 불빛으로도 충분히 밝은 양재천 밤길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 왼쪽 머리 위가 유난히 밝았다. 오른쪽은 당연히 가로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도 왼쪽은 풀과 양재천뿐인데. 걷는 내내 내 왼쪽에서 불빛 하나가 따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뭐지? 뭔데? 계속 나를 따라오는 거야?"

 

양재천 밤길을 환하게 밝히는 건 가로등만이 아니었다. 하늘 높이 뜬 하얀 달. 달이었다. 오른쪽의 가로등은 가만히 있지만 달은 나를 계속 따라오는 것 같았다.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듯한. 가로등이 없어도 너의 산책로 하나쯤은 충분히 밝게 비출 수 있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왼쪽에 있던 달은 어느새 내 머리 위로 자리를 옮기더니 집에 가까이 왔을 때 달은 내 오른쪽으로 왔다. 달과 함께 걷는 양재천 밤길. 양재천의 밤은 또 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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