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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천에서 따라갈 수 없는 그녀를 만났다. 걷는 아저씨, 26일

일상/하루하루

by gyaree 2019. 6. 4.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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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13 / 22,059보

 


 

걸으며 터득하는 인생의 묘미.

우산 쓰고 걷는 여인 / 영동 2교와 3교 중간 지점

선한 경쟁은 나를 향상시킨다.

나는 이곳을 걸으며 우연히 라이벌이 생겼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양재천 산책로 코스에서 두 번째 그녀를 만났다. 영동 1교에서 시작해 영동 6교까지 이어지는 산책로. 이 길은 걷기에 최적이다. 양재천에서 최고의 코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른쪽으로 울창한 나무숲이 햇볕을 가려주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우선 길바닥이 깨끗하고 어디 한 곳 성한 데 없이 쾌적하다. 또 하나 좋은 점을 꼽으라면 걸으면서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 왼쪽 아래 자전거 도로와 인도가 있는 쪽은 길은 편하지만, 굴곡이 없다. 그냥 평평한 길이다. 음식으로 치면 싱거운 맛이랄까. 이도 저도 아닌 밋밋하게 살아온 내 인생과도 닮았다. 그에 비해 한 단계 위에 있는 이 산책로는 오르막길이 있는가 하면 내리막길도 있어서 다리에 적당한 압박감을 선사한다. 오르막길을 갈 때 다리 근육의 움직임과 내리막길에서 발을 디딜 때 근육이 활성화되는 부분은 정말로 차이가 크다. 내리막길이 무릎에 살짝 충격이 더 간다면 오르막길은 허벅지와 종아리가 빵빵해지는 느낌이다. 평평한 길을 걸을 때 느끼지 못했던 다이내믹한 몸의 반응 때문에 이 길은 혼자 걷는 사람을 따분하지 않게 해 준다. 또한 길 양옆으로 꽃과 나무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 향기롭기까지 하다. 한 단계 아래로 내려가 양재천변을 걸을 때 가끔은 역한 냄새가 풍기기도 하지만 이곳은 아니다. 풀 내음, 바람이 건드려 흐늘거리는 꽃잎에서 발산하는 상큼한 향기가 코로 들어오면 엔도르핀이 솟아난다. 그리하여 이 길은 걸으면 행복해지는 길이다. 자신의 두 발로. 이곳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 길에서 풍기는 기운과 정신을 맑게 해 주는 향기를. 매일 아침 나는 이 길로 들어오기 위해 땡볕을 참으며 30여 분을 걸어온다. 등에서 땀이 흐르다가도 이 길로 들어서기만 하면 그 땀은 이내 증발해버린다. 자연의 선풍기가 따로 없다. 바로 이 길이 선풍기이고 에어컨이다.

 

어느샌가 앞에서 그녀가 걷고 있다. 그녀는 항상 우산을 쓰고 걷는다. 그녀도 나처럼 이곳까지 오기 위해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구간을 걸어온 모양이다. 이곳이 아니고서는 자외선을 막아줄 방패는 이 도시에서는 흔하지 않으므로 그녀가 우산을 든 이유가 짐작된다. 그런데도 그녀는 녹음이 가득한 터널 산책로에서 우산을 쓰고 걸어간다. 자연히 그녀가 눈에 띈다. 이 길에서 우산을 쓴 사람은 그녀뿐이라서. 그녀를 본 것은 오늘로 두 번. 나의 뇌리에 각인된 것은 시원한 그늘에서 우산을 쓴 모습이 아니다. 나도 이제는 어느 정도 걷기에 익숙해져 다른 사람보다 걷는 속도가 느린 편이 아니다. 1km 걷는데 대략 10분 정도 속도로 걷는다. 조금 더 속도를 올리면 9분 30초까지 기록하기도 한다. 나름 빠른 속도라고 자부한다. 가능한 한 앞에 가는 사람을 제치고 걸어가므로 느리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다. 지난번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오늘도 나의 두 다리는 그녀의 얇은 다리를 따라갈 수 없다. 게다가 그녀는 오른손에 우산까지 들고 있지 않은가. 눈으로 계속 그녀를 좇고 있지만 다리는 따라가지 못한다.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는데도 그녀는 점점 내 시선에서 작아지고 있다. 분명히 이 길을 한두 번 걸어본 솜씨가 아닐 것이다. 혼자 걸었던 길에 경쟁자가 나타나 내심 기쁜 마음이 든다. 물론 다른 사람도 이 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녀만이 유일한 경쟁자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걷다가 앞에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생각에 발걸음 속도를 올리곤 한다. 내 앞에 시야를 가리면 답답하기도 하거니와 묘하게 앞서 나가고 싶은 의욕이 끓어오른다. 그렇다고 모든 길에서 그런 반응을 하지는 않는다. 양재천 길에서만 그렇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녀와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피치를 올렸다. 반응은 곧바로 나타났다. 등 뒤에서 축축한 땀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온몸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다. 무리하게 다리를 빨리 휘저었던 탓인지 허리도 살짝 저린다. 그래도 그녀는 끄떡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우산을 받쳐 쓰고 길게 땋은 머리는 찰랑거리며 무릎까지 오는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내가 뒤에서 쫓아오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걸으면 걸을수록 작아지는 그녀. 그녀는 걷기의 달인인가. 얼마나 걸었기에 저런 스피드로 걷는다는 말인가. 아! 따라잡고 싶지만, 나의 걷기 실력은 그녀를 이길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 세상에는 실력자가 넘쳐난다는 사실을 이런 산책로에서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녀는 나를 다시 한번 놀라게 한다.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 그녀. 운동복도 아니고 평상복 차림을 하고서 뛰어간다. 마침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직선 코스에선 웬만큼 멀어도 보이던 그녀가 이리저리 휘는 길로 들어서니 보이지 않는다. 이 길은 곧게 뻗은 길만 있지 않다. 가다가 오른쪽으로 휘기도 하고 왼쪽으로 휘기도 하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길이다. 나도 따라서 피치를 올렸다. 걷기 대회를 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내 몸이 그녀를 따라서 반응한다. 다시 그녀가 저 멀리 내 시야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안도감이 밀려온다. 그녀는 계속 달리지만은 않았다. 하나의 루틴이 있었다. 걷다가 달리다가 걷다가 달리기를 반복하면서 걸어갔다. 양재천에서 걷기 달인을 만난 기분이랄까. 흡사 무협 소설에나 나오는 축지법을 쓰면서 걷는 도인처럼. 내 눈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하면서. 그녀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지. 영동 6교까지 걷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경쟁자가 있다는 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왜? 이 나이가 돼서야 이런 단순한 원리를 깨닫는지. 그저 쑥스러울 뿐이다.  

 

걸으면서 나는 나름대로 재미를 찾기도 하며 인생을 알아간다. 걷기 전에는 몰랐을 희열과 삶의 깨우침.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에게서 받는 자극. 이런 소소한 일상의 재미를 터득한다. 걷기가 지루해질 때는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려보라. 그렇다고 스토킹은 금물. 모든 사물을 유심히 바라보면 그곳에서 새로운 내면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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