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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직업이 사라진다

아소사잡

by gyaree 2017. 7. 20.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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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4차 산업 4차 산업 하면서 지식인들의 입에서 입버릇처럼 떠드는데, 도대체 이게 뭐야? 나와 같이 하루하루가 힘겨운 사람에겐 TV 광고에서 4G 이동 통신을 넘어서 오지로 접어들었다는 소리를 들어야 아주 쪼금은 감이 잡힌단 말이지. 아아! 그냥 인터넷이 빨라지는 거군. 그냥 딱 요정도다. 지난 대선에서 철수가 그렇게 입에 달고 다닌 4차 산업 혁명. 새로운 산업이 태어나고 발달하면서 기존의 직업이 사라진다는 뉴스는 이제는 싫증이 날 만큼 봤어. 뭐 앞으로 사라질 직업에 관련해 쫘악 나열한 기사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래도 내가 일하는 직장은 그 리스트에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한 적이 있지. 그런데 이게 과연 다행일까?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아무래도 내 밥줄이 걸린 문제니까.



시간을 거슬러 20년 전으로 가볼게. 1997년, 참 힘들었던 시절이지. 굳이 말 안 해도 잘 알 거야. 왜 힘들었는지. 그런데 난 그때 인생 첫 직장을 얻었어. 남들은 다 해고당하고 잘리던 시절 그냥 감지덕지하지 뭐. 


“대기업에 들어갔냐고?” 

“아니.”


그냥 조그마 치도 않고 크지도 않은 중소기업. 아마도 지금 중소기업에 가는 거 싫어하는 젊은이들 많을 거야. 대기업하고 연봉 차이가 그렇게 많이 벌어지니. 당연히 가고 싶겠어? 

하지만, 쥐뿔도 내세울 게 없는 내겐 그 중소기업은 마치 거대 기업의 삼성에 입사한 기분이었지. 그냥 허접한 나를 뽑아준 건만 해도 고마울 따름이었어. 실제로 이 회사에선 먼저 뽑아 놓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날 출근을 하지 않아 후보군으로 분류된 내가 행운을 잡을 수 있었다고 회사 팀장이 말하더군. 그렇게 좋은 회사도 아닌 곳에 겨우겨우 들어갈 정도였으니 내겐 특별한 능력이 보이지 않았던 거지. 아무런 재능이 없는 놈이 회사에 오래 붙어 있을 가능성은 크니까 말이야. 돌이켜 생각해 보면 딱히 내가 내세울 만한 특기나 장기도 없었으니까. 나를 뽑는 사람이야 그런 것이 더 잘 보였겠지. 아무튼, 실력이 있어 뽑힌 것은 아니고 그 자리에 뽑힌 놈이 출근하지 않아 내게 운이 온 거지. 


이게 내 첫 기회라면 기회를 잡았다고 얘기할 수 있지. 엄밀히 말해 팀장이 내게 찬스를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자 이제 내가 들어간 회사가 뭐 하는 곳인지 말해볼게.




애니메이션 


내 나잇대에 애니메이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아무래도 ‘미래소년 코난’이나 ‘은하철도 999’ 정도야. 창피하지만 전부 일본 거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손으로 그린 동화 수만 장을 이어 붙여 만화 동영상을 만드는 회사였어. 이렇게 멋진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멋져! 애니메이션이라는 단어에서도 무언가 풍기는 느낌이 좋잖아. 애니메이션 회사 다닌다고 하면 ‘오오’ 했던 시절도 있었어. 딱 이 시기가 미국이나 일본에서 하청으로 들어오는 애니메이션 분량이 황금기를 이뤘던 시절이지. 당시 애니메이션 회사 사장들은 대부분 건물을 지어 올렸으니까.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우리 같은 노동자의 실상은 최악이었다고. 불행한 건 지금도 그렇다는 거야. 


오늘은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사라지는 직업, 아니 직업이 아니라 ‘프로세스’라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거 같군. 굳이 4차 산업 혁명까지 가지 않아도 이쪽 업계도 많은 변화가 생겼지. 20년간의 경험을 풀어보기로 하겠어. 많은 사람이 직업이 사라진다고 하는데 직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직업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프로세스가 사라진다고 봐. 이런 프로세스가 사라지는 현상은 애니메이션 업계도 피할 수 없었지. 당연히 산업이 발전하니까 그 자리를 테크놀로지가 채우게 된 건데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 기술 개발자들이 미울 뿐이야. 기존에도 잘 해왔는데 새로운 기계가 들어오면서 자꾸만 우리의 job을 뺏어가고 있으니까. 일을 잘 못 해서 잘리는 게 아니라 컴퓨터와 기계에 떠밀려 나가고 있으니. 그래도 아직 내 자리는 괜찮지만, 나도 언젠가는 그런 날을 겪게 될지도 몰라 쫓겨나거나 그만둔 그들을 위로하는 뜻에서 테크놀로지에 밀린 이들의 이야기를 써봐야 할 것 같아. 앞으로의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1997년 내가 처음 이 업계에 발을 들여놨을 때는 애니메이션 제작 프로세스에 전문적인 컴퓨터와 소프트웨어가 등장했던 시기라고 감히 말할 수 있어.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합쳐지는 과도기의 시작이었지. 많은 스튜디오도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던 초기였으니까. 애니메이션 업계로서는 많은 투자비용이 들어갔던 시기였지만, 그만큼 본전을 뽑고도 남아 넘칠 만큼 일이 많았어. 사장들의 주머니에서 금쪽같은 돈이 빠져나갔어도 1년만 굴려도 충분히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분위기였어. 이런 기류에 힘입어 2D 애니메이션 업계에 새로운 작업 방식이 자리 잡을 수 있었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엔 어떤 부서가 있을까?


애니메이션을 잘 모르는 사람도 애니메이션은 종이 위에 연필로 수많은 그림을 그려서 만든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도 그 안에서 어떤 프로세스로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어 내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 거야. 간략히 말하면 애니메이션 프로세스는 크게 두 가지 파트로 구성된다는 것. 


전반부(손으로 그리는 파트) - 레이아웃, 원화, 동화

후반부(최종 결과물을 만드는 파트) - 배경, 스캔, 잉크&페인트, 촬영  

(이외에도 세부적인 파트도 많은데 용어가 어려우면 이해하기 힘드니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쉽게 말해 전반부는 종이 위에 애니메이션 동작을 그리는 사람이고 후반부는 연필그림에 컬러를 칠하고 최종적인 결과물을 뽑아내는 사람이지. 


애니메이션 작업에 본격적으로 컴퓨터가 도입되고 제일 먼저 타격을 입은 부서는 어디일까?

정답부터 말하면 잉크&페인트와 촬영 부서다. 

아쉽게도 회사의 카메라가 사라진지 오래 _ 박물관에 있는 카메라로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근 4~50년간을 투명한 셀에 잉크&페인트 작업을 해왔고, 검은색 커튼으로 사방이 가려진 암실에서 큰 철제 프레임에 매단 35mm 필름 카메라로 한 장 한 장 촬영하며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었어. 잉크&페인트 작업은 셀에 붓으로 동화 라인을 그리고 물감으로 채색하는 과정이고 이것이 아날로그 방식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어. 컴퓨터와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가 보급되어도 레이아웃, 원화, 동화, 배경은 그대로 아날로그 방식을 유지했지만, 나머지 후반 공정인 잉크&페인트, 촬영은 컴퓨터로 대체되었고 동화를 디지털 파일로 전환하는 스캔 파트가 새로운 프로세스로 태어났지. 스캐너로 스캔한 그림 파일은 컴퓨터로 채색하고 최종 결과물을 만드는 컴퓨터 촬영 작업으로 바뀌었어. 아마도 2006, 7년 정도까지는 아날로그 작업과 디지털 작업이 공존했던 시기라 잉크&페인트, 촬영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그들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지만 그래도 job을 잃지 않고 밥벌이할 수 있었어.



그다음 job을 잃은 파트는 물감과 붓으로 그리는 배경. 

스캐너의 성능 향상과 이제는 국민 툴이 되어버린 뽀샵(포토샵)의 출현으로 종이와 물감을 사용했던 아날로그 아티스트들의 프로세스도 디지털로 전환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지. 이 배경 작업은 지금까지도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는 스튜디오가 있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제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봐. 대략 2008, 9년까지도 아날로그 배경팀과 디지털 배경팀은 하나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공존했어. 기술의 변화에 용케 올라탄 사람들은 디지털로 전환할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의 job을 잃었어.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수십 년간 붓과 물감으로 그렸던 사람들이 포토샵으로 컴퓨터에 그리는 작업에 익숙해지기란 쉽지 않았지. 촬영 부서도 마찬가지. 컴퓨터에 컴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컴퓨터를 알아야 하는 스트레스는 정말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몰라. 종이에 그린 배경을 스캔하고 색 보정하는 작업은 점차 사라지고 모든 과정을 컴퓨터에서 처리하는 프로세스는 붓과 물감을 사라지게 했어. 



그리고 다음 사라진 파트는 무엇일까?

배달이다. 먼저 배달의 민족을 생각할지 모르지만, 네트워크 통신의 발전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작업이 끝난 필름이나 베타 테이프를 가지고 매일매일 공항으로 달리는 무역부 직원들의 job을 빼앗았어. 수작업 촬영 파트와 디지털 후반 파트가 공존했던 시기에 최종 결과물은 35mm 필름과 베타 테이프로 만들어졌어. 이 최종 결과물을 들고 미국의 디즈니, 카툰네트워크, 폭스 같은 스튜디오로 떠나는 비행기에 태우기 위해 새벽같이 들고 날랐던 부서가 있지. 이미 다들 알겠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은 주로 미국, 일본 하청 작업이 주류라는 것. 작업이 완료된 결과물을 무사히 제날짜에 보내기 위해 김포공항까지 매일매일 달렸어. 그 시절 오토바이 퀵이나 택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물론 있다손 치더라도 중요한 작업물을 남의 손에 맡길 수는 없었어. 컴퓨터와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의 발전으로 35mm 필름은 베타 테이프로 교체되었고, 인터넷의 발전은 베타 테이프를 디지털 동영상 파일로 바뀌었고 FTP로 전송하는 네트워크 전송 프로세스로 변하게 했지. 

애니메이션 책상 _ 이 자리를 컴퓨터가 채웠지






종이의 사라짐.


1950~1990년대 중반 아날로그 시대.

1997~2009년 아날로그 + 디지털 시대.

2010년 이후 FULL 디지털 시대.


왜 2010년이 FULL 디지털 시대 인가?


2010년 한국의 2D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최초로 100% 디지털 애니메이션 프로세스로 전환하는 시기를 맞이했어. 아시아에서 최초라는 타이틀도 얻을 수 있었지. 기존의 애니메이션이 종이에 모든 그림을 그렸다면 이 시기는 모든 공정이 컴퓨터에서 만들어지는 프로세스로 발전했다는 것.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이 시작되고 2010년은 2D 애니메이션 제작 환경에 큰 획을 그었던 해가 아닐까 생각해. 장기 프로젝트인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최초로 종이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컴퓨터만을 사용해서 제작하는 프로세스로 전환했으니까. 당연히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준 결과. 그동안 종이가 아니면 수십 만장의 동화를 그릴 수 없었던 환경이 디지털 태블릿과 소프트웨어의 발전으로 모니터를 보면서 또는 모니터 바로 위에 동화를 그릴 수 있는 상황이 된 거야. 이런 프로세스의 전환에서 당연히 아픔도 존재했어. 수십 년을 아날로그 종이 위에 연필이나 펜을 사용했던 애니메이터들에게는 컴퓨터에 대한 스트레스는 상당했지. 마우스와 클릭, 더블클릭이라는 단어조차 모른 사람들에겐 새로운 프로그램을 배워야 하고 익숙하지 않은 디지털 연필을 사용해야 했어. 수개월 이 프로세스에 적응하려 했지만, 반수 이상은 떨어져 나갔어. 이들에게는 컴퓨터 자체가 공포로 다가왔지. 이만큼 애니메이션 공정에서 종이가 없어진다는 것은 큰 사건이자 그들의 job을 뺏는 결과를 가져왔어. 물론 그때 힘들지만 잘 참고 적응한 애니메이터들은 지금 오히려 디지털의 많은 장점이 좋아 다시는 아날로그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해.


스캔 부서도 사라지는 시점

종이가 사라지면서 다시 디지털 프로세스 중 하나인 스캔 부서도 점차 사라지고 있어. 종이 원동화를 스캐너에 밀어 넣고 컬러 채색을 위해 디지털 파일로 전환하는 작업이 없어지는 거야. 종이 동화가 없으니 스캔 부서 인원도 당연히 일거리가 줄어들고 있지. 종이로 인해 아날로그 프로세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 디지털 프로세스도 같이 사라지는 단계로 접어들었어.

복사기 _ 이 업계에선 제록스라 부르지





복사기도 점차 사라질까?

복사기 또한 아날로그 애니메이션 제작 프로세스에서 없어서는 안 될 디지털 기기다. 종이에 그린 동화를 같은 위치에 있게 하거나 떨리지 말아야 할 경우 복사기로 복사해서 동화지에 오려 붙이는 일이 허다해. 업계에서는 ‘제록스’ 라 부르는 이 작업도 종이가 사라지면서 자연히 없어지는 기기가 됐어. 라이트테이블이 붙어있는 애니메이션 데스크는 CintiQ(액정 태블릿)와 컴퓨터 모니터가 있는 책상으로 대체되었고, 동화지의 구멍을 뚫는 장비도 점차 사라지겠지. 이렇듯 애니메이션 작업 공정에서 종이를 사용하는 모든 작업은 하나씩 하나씩 디지털로 전환하고 있어.  


종이 절단기 자동종이 절단기 수동



인공지능, 사물 인터넷, 로봇기술이 주도하는 차세대 산업혁명을 4차 산업이라는 단어로 지금 세상은 떠들썩하다. 어떤 직업이 사라진다는 둥, 불안한 마음만 쌓이게 하지. 나도 조만간 잘리는 거 아냐? 빨리 4차 산업이라도 배워야 하는 건지. 


“AI가 알아서 애니메이션도 만들어 줄 거야” 


이미 연필로 외곽선으로 그림만 그리면 자동으로 채색해 주는 사이트가 있는 걸 보면 멀지 않은 미래에 애니메이션 제작 환경도 많이 바뀌겠지. 내가 20년을 넘게 몸담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만 보더라도 많은 작업 프로세스가 사라지고 또 새로운 공정이 태어나기도 했어. 자신의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며 변환 환경에 무사히 안착한 사람도 있는 반면, 변한 환경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어 떠난 사람도 많아. 


직업이 사라진다고 겁을 주는 많은 주장은 어쩌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산업이 발전한다는 전제하에 하나의 직종에서 오랜 시간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직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단지 프로세스가 바뀌었다 말할 수 있어. 변화된 프로세스에 적응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180도 바뀐 환경은 누구라도 적응하기에 쉽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 특히 급변하는 디지털 기술을 따라가기엔 이젠 나이도 먹었고 너무 숨이 차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지. 급변하는 시대에 자신이 걸어온 길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는 것이 현명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도 부인할 수 없어. 내가 있는 이곳에도 많은 동료가 떠나가고 새로운 사람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는 무한대 루핑은 계속 이어지고 있지. 나의 직업은 사라지지 않지만, 내가 오랜 시간 유지해온 프로세스를 바꾸고 있고 그 프로세스를 배우지 않으면 내 자리도 누군가의 자리로 채워지겠지.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동료들을 볼 때마다 내게도 저렇게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job을 찾아 떠날 용기가 생길까? 


프로세스가 사라지는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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