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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모리사와 아키오]

책소개/소설

by gyaree 2017. 8. 22.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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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마지막 데이트일 테니까."

"......"

에지는 아무 말 없이 자신도 새 바지로 갈아입고 티셔츠 위에 빳빳한 반소매 버튼다운 셔츠를 걸쳤다.


요코와는 15년 전에 결혼했다.

그 당시 에지는 48세, 요코는 38세. 조금 노력하면 아이를 가질 수도 있는 나이였지만 두 사람은 평온하고 조용한 어른들만의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로 했다.


살았구나, 좋았을 텐데...... 요코는 모두 과거형으로 말한다. 그런 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에지는 자꾸 미래를 말하고 싶어진다.

"음, 내일은 요코가 좋아하는 고등어 초회라도 사 올까? 역 앞에 맛있는 집이 생겼던데."

말주변이 없는 에지는 횡설수설하면서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말을 내뱉고 만다. 이런 때야말로 침묵은 금이라는 말을 통감한다.



가슴 안쪽에서 넘쳐나는 여러 '생각'들이 열을 품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어떤 '생각'도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만약 준비되지 않은 채 '말'로 바뀐다면, 한없이 '안녕'에 가까운 울림을 동반할 것 같다.

에지는 잡은 손의 온기에 마음을 담았다.

요코의 손이 에지의 손을 살짝 맞잡은 순간, 여태까지 줄곧 붙잡고 있던 에지 안의 가느다란 실이 뚝 끊어졌다.

갑작스레 눈꼬리에서 물방울이 주르르 넘쳐 귓속으로 흘러내린다.

딸랑.

요코가 좋아하는 풍경이 울린다.

두 사람은 늘 보아 익숙해진 천장에 시선을 준 채, 이불 속에서 가만히 손을 잡고, 소리 죽여 울었다.


시한부 선고는 뻔뻔한 데다 방약무인했다. 노크도 하지 않고 이 집에 들어오더니, 그날부터 일상속에 단단히 버티고 앉았다. 그후로 요코와 나는 '시한부'라는 줄어드는 시간의 흐름에 지배당하고 협박받으며 지난 반년을 보냈다. 하루하루가 굉장히 무겁고, 짧고, 농밀하고, 허무했다. 아름다운 계절의 변화를 보고도 조건 없이 감동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협'으로 느꼈다. 벚꽃이 졌다, 치자나무 향기가 났다, 수국이 피었다, 벼 이삭이 여물었다, 유지매미가 울었다, 이 모두가 아름다운 가사였다. 가시는 가차 없이 우리의 마음을 찔러, 질척질척한 피를 흐르게 했다.



딸랑, 딸랑.

마음 안까지 쓱 들어올 것 같은 맑은 음색이 가을바람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온다. 그 소리와 바람이 울적하고 답답했던 기분을 조금은 정화해줄까? 그런데 이 소리를 들을 때 보여주곤 했던 요코의 기쁜 미소가 떠올라, 오히려 가슴이 아련하게 아파온다.

딸랑.

9월의 바람이 레이스 커튼을 살짝 흔든다.


요코가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정확히 아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쩐지 불안하기도 하다. 결국 하고자 하는 일에 내가 자신이 없는 것이다. 옛날부터 그랬다. '모험'을 싫어하고 앞을 쉽게 내다볼 수 있는 길만 선택하며 살아왔다. 늘 위험을 두려워하고, 아니, 두려움을 느끼기도 전에 위험이 뿜는 온갖 냄새로부터 냉큼 떨어지려 애썼다. 게다가 그런 인생이 괜찮은지 아닌지를 생각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그러다 요코와 결혼한 후로 조금씩이라도 변해가는 나를 자각할 수 있었다.


다 끝났을 때 시간은 이미 저녁 7시 반이 지나 있었다.

갓 완성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움직이는 나의 집이 은은한 나무 냄새로 가득하다.

"후. 드디어 완성이네."

무심코 혼잣말을 한다.

2인용 침대이니 넉넉하게 대자로 뻗으면 좋으련만, 나는 자연스럽게 오른쪽 옆에 엎드려 있다. 그러다 왼쪽이 휑하니 빈 걸 보고 축축한 한숨을 흘리고 만다. 15년간 부부침실 왼쪽에 요코가 있었다. 그 습관이 이런 데서도 나타나다니.....

그러면서도 일종의 흥분을 느낀다. 드디어 자유로운 인생을 위한 연습 운전 격인 여행을 떠난다. 게다가 그 종착지엔 요코의 편지가 기다리고 있다.

내일 출발할 거야, 요코.

당신이 계획한 짓궂은 장난에 기꺼이 걸려들게.

짓궂다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내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죽은 아내의 '장난'에 걸려들다니, 조금은 유쾌해졌다.

후후후, 하고 장난스럽게 웃는 요코를 생각한다.

요코는 자주 그런 표정으로 웃곤 했다.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해서, 나는 "후우" 하고 일부러 조금 밝은 한숨을 내쉬면서 감정을 속여보려 애쓴다. 


오랜 세월에 걸쳐 내 인생에 두껍게 눌어붙은 몇 가지 습관은 온몸을 빈틈없이 감싼 갑옷과도 같았다. 애써 버껴낸 부분이 생살이 드러나고 바람에 노출되니 불안한 마음도 들지만, 그만큼 홀가분해진 상쾌함을 맛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확인한다.

"우연한 만남이란 멋진 일이 생길 징조인데, 그게 세 번 이어졌을 때 놀랄 만한 기적이 일어난다."


스기노가 곁에 없는 '여행'은 혼자라는 고독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뒤집어보면 그곳엔 어김없이 '자유'라는 구김 없는 날개가 존재한다.


혼자 하는 여행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같은 여행이라고 내 입이 쓸쓸하다고 말하면 쓸쓸해지고, 자유롭다고 말하면 자유로워진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쪽을 내 것으로 만들지, 그 선택으로 여행의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아마 앞으로 이어질 나의 외톨이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쩌면 '내가 어느 측면을 보는지'로 세상이 몽땅 바뀌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요코가 말한 대로, 미래는 분명 바꿀 수 있으리라.


하얀 바탕에 녹색 선이 그려져 있고, 왼쪽 아래에는 초롱꽃 그림이 인쇄되어 있다.

풍경과 꼭 닮은 모양의, 요코가 좋아했던 꽃이다.

만년필로 정성껏 써내려 간 요코의 글씨는 바다처럼 깊은 남색이었다.


당신에게


첫 네 글자를 본 순간, 내 가슴속에서 요코의 낭독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정말로 간단한 일이었다.

그저 맨발로 문밖에 한 걸음 나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이렇게나 달라진다. 이 작은 한 걸음이 세상과 나를 바꾸는 기회다.

단 한 걸음.

'0'이 아닌, 한 걸음.

그 차이는 무한에 가까울 만큼 거대한지도 모른다.

내가 바뀌면 미래도.....

바뀌겠지? 요코.

돌풍이 불어 바로 옆에서 비가 세차게 몰아친다.

비틀거리면서도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기분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당신을 위해 뭔가를 해주겠다라는 말보다, 하루하루 작은 행동을 소중히 쌓아나가는 것이 부부에겐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제 곧 오늘만의 태양이 저문다.

다시 살 수 없는, 단 하나뿐인 오늘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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