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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아저씨, 2일 째 18,879보

일상/하루하루

by gyaree 2019. 4. 2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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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무덤

 

 


 

비둘기 식당

오늘 많이 먹어! 여기 뷔페야!

"애들아! 이리 와봐. 여기 뷔페 장난 아니야. 먹을 게 엄청 많아. 종류도 다양하다. 음식 이름은 모르겠지만 우리가 먹던 벌레와 완전히 다르다고. 노랑, 빨강, 연보라, 하양, 주황색도 이쁘고 넘쳐나. 사람들이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다고 했잖아. 누가 이런 아름다운 밥상을 차려놨지? 오늘 배불리 먹을 수 있겠어. 그냥 일렬로 서서 아무 줄이나 골라잡아. 음. 나는 여기 노란색이 마음에 들어. 나는 저기 연보라가 마음에 드네. 나는 빨간색 쪽으로 갈 거야. 노란색 먹다가 질리면 빨간색으로 넘어갈 거야. 그쪽 연보라색 맛은 어때? 맛있어?" 

 

걷다가 잠시 멈춤. 형형색색의 꽃밭 앞에서 나도 모르게 발길이 멈췄다. 팬지 꽃밭이었다. 그런데 그 밭은 이미 비둘기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100미터 빨간 트랙에서 선수들이 달리듯이 비둘기들도 각자 하나의 트랙을 꿰차고 있었다. 팬지를 심어놓은 사이사이에 많은 비둘기가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뾰족한 부리로 연약한 꽃잎을 쪼아대며 포식 중이었다.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고개는 바삐 돌아갔다. 처음엔 꽃구경이라도 나왔다고 생각했다. 봄이 오니 새들도 이쁜 꽃을 찾아서 마실을 나왔구나 싶었다. 잠시 바라보고 있노라니 꽃구경이 아니었다. 지금 화사하게 꽃잎을 멋들어지게 열어젖혀 사람들의 눈을 호강시켜 줄 적기이거늘. 애석하게도 팬지밭은 비둘기들의 채식 뷔페가 되고 말았다. 사람도 매일 집에서 같은 것만 먹으면 질리듯이. 가끔은 분위기 좋은 고급 레스토랑도 때로는 필요하다. 무언가 답답한 속을 풀어주고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말이다. 허구한 날 땅속 벌레나 찾고 다녔을 그들에게도 이 팬지밭은 고층빌딩 스카이라운지가 아니었을까. 인생도 가끔은 내가 누리지 못했던 호사를 누릴 날이 있어야 행복하다. 다만 그 호사가 계속 이어져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날이 찾아오면 안 되기에. 욕심부리지 말고 아주 가끔, 아주 가끔만 내 인생에 비둘기 식당이 있기를 바란다.


   

자극을 주는 사람들

힘들지 않으세요?

필요한 건 오직 의지. 걷다가 힘들 때, 절룩거리며 걸어가던 아저씨를 떠올려보자. 

걷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친다. 내 옆을 스치며 더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사람도 있고. 빨리 걷는 사람, 느리게 걷는 사람, 궁둥이를 실룩샐룩 요동치며 걷는 사람, 이어폰에서 흐르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걷는 사람. 정장 차림의 아저씨, 하체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레깅스를 입고 걷는 여성. 아침 운동 나오신 할아버지. 각자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은 걷는 것 같다. 내 앞으로 백팩을 메고 무언가 쫓기듯이 걷는 아저씨.

'왜 저렇게 빨리 걷지? 뭐가 저렇게 급할까?'

아저씨의 걸음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걸음도 느린 편은 아닌데. 나보다 적어도 두 배는 빠른 속도다. 그런데 어딘가 자세가 좀 이상했다. 왼쪽 다리가 불편한지 절룩거리며 걷고 있었다. 아마도 한쪽 다리가 장애가 있는 듯 보였다. 몸의 균형이 왼쪽으로 많이 기울며 자세가 불안했다. 왼쪽 어깨가 심하게 내려갔다 올라왔다 반복하면서. 보고만 있어도 몸에 무리가 가해진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아저씨의 발걸음은 지치지 않는다. 오히려 사지 멀쩡한 나보다 훨씬 앞서가니. 한두 번 걸어본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몸이 그런데도 나보다 빠를 수 있다니. 육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걷겠다는 의지. 걸어야만 하는 신념이랄까. 걷는 게 지치고 힘들지만, 내게도 자극이 전달됐다. 저 아저씨도 분명히 힘들 텐데. 다리도 장애가 있으니. 더더욱. 내가 걷지 않았다면 모를 일이다. 물론 아무런 자극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걷는 이에게 육체적인 장애 하나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필요한 건 오직 의지. 걷다가 힘들 때, 이 아저씨를 떠올려보자. 

 


 

 

 

파종지

무엇이 자랄까?

너의 존재가 궁금해!

봄이 오면 사람들이 이곳에 줄을 치고 씨앗을 심는다. 아무것도 없던 맨땅에 화사한 꽃잎들이 얼굴을 내밀면 마음이 즐겁다. 기다림의 시간. 따스한 햇볕과 시원한 빗방울이 만들어낼 땅속 밑 정체. 이렇게 볼품없는 흙만 덮여 있던 땅에서 어떤 식물이 탄생할지. 보는 내내 궁금하다. 아직은 춥다고 몸을 내밀지 않은 씨앗들. 드문드문 푸르른 녹색의 싹들은 답답함을 참지 못해 땅을 뚫고 튀어 올랐다. 땅속 깊이 숨은 씨앗들은 매일 아침 햇살의 기운을 느끼며 이제나저제나 나갈 일만 준비하고 있겠지. 팬지와 국화는 이미 땅을 뚫고 올라왔건만. 도대체 너희들은 무엇이길래. 아직도 그 안에 숨어 있니. 4월도 이제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매일매일 나는 지나가며 너희를 감시할 거야. 너희들의 존재가 궁금해졌거든. 

 


 

고개 아프다

넌 뭔데 이렇게 높이 올라갔어?

"쳐다보지 마! 그냥 앞만 보고 걸어."

양재천을 걷다 보면 내 고개를 아프게 하는 녀석. 이곳을 지날 때면 항상 다짐한다. "쳐다보지 마! 그냥 앞만 보고 가라고." 그러나 내 고개는 여지없이 저절로 하늘 높은 곳으로 향해 있다. 왠지 모르게 조종당하는 느낌. 마치 마리오네트 인형이 춤추는 것처럼. 안 보이는 줄에 엮여 끌려 올라간다. 나를 마리오네트로 만들어 버리는 건물. 타워팰리스다. 저 멀리 몇 킬로 밖에서도 위용을 자랑하는 아파트. 심지어 우리 집 앞 도로 한복판에서도 보이니. 보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눈에 걸리는 녀석이다. 보고 싶지 않은 이유는 단 한 가지. 나는 그곳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멀리서만 바라보던 이 녀석의 존재를 바로 밑에 와서 고개를 쳐든다. 그 높은 장벽이 바로 내 앞으로 쏟아질 것만 같이 엄청나다. 옛말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던가. 그런데 이놈에 나무는 저 멀리 몇십 리 밖에서도 보이니. 안 쳐다볼 도리가 없다. 게다가 나는 매일, 이 밑을 지나다니고 있으니. '부럽다' 그런 감정은 아니다. 아니, 솔직히 '부럽다'. 대한민국 1%가 사는 곳이라고들 하는데. 안 부러우면 그게 이상한 거다. 부러워하지 말자! 부러워하지 말자! 되새김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계속 걸어라! 딴생각하지 말고 걸어라. 이곳에서 걷는 방법은 무상무념(無念無想) 걷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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