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버스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저 버스를 따라 걸어보면 어떨까?' 내가 타보지 않은 버스를 타고 가보지 않은 동네로 가는 상상. 무작정 버스 뒤를 따라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멈추고 싶은 동네가 나오면 한숨 돌리기도 하면서. 성취하지 못할 상상은 아니다. 다만 그럴 용기와 자신이 없을 뿐. 누구는 헛된 짓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할 일 없어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우리 삶에 자동차나 버스, 지하철을 타지 않는 생활은 꿈을 꿀 수도 없다. 그런 것들이 없던 시대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렇게 나의 일상, 아니 우리의 매일매일은 타고 다니는 것과 함께한다. 둥그런 바퀴들이 내 몸을 싣고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편리함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런 고마운 현대 사회 기계들의 단점은 속속들이 파고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동차나 버스를 타고 다니며 아쉬운 순간이 바로 이때다. 이쁜 가게나 상점들이 차창 뒤로 휙 하고 순식간에 사라졌을 때의 여운.
'아! 저 가게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은데'
그런 순간이 있다. 도중에 벨을 눌러 내릴 수도 없을뿐더러 그곳에서 내린다고 해도 또다시 번거롭게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 가려는 목적지가 그곳이라면 하차 벨을 눌러서 내리면 그만이지만 느닷없이 눈에 들어온 이쁘고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지나치기에 십상이다.
오늘은 꼭 한 번 가고팠던 곳을 향해 걸었다. 일명 버스 따라가는 길. 출퇴근 시간 버스 창밖으로만 눈에 담았던 장소.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자그마한 책방이다. 언젠가 하얀색으로 외벽을 칠한 서점이 문을 열었다. 유독 내 눈에 걸렸던 책방. 어쩌면 개인 서점을 저리도 이쁘게 만들었을까. 버스 안에서 항상 그 안이 궁금했다. 어떤 책들이 있을까. 내가 사는 동네 지하상가에 작은 서점이 있어도 그곳은 호기심이 일지 않았다. 내 머릿속 가보고 싶은 곳 리스트에 굳이 가봐야 할 곳이 아니었다. 흔히 봐왔던 서점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 참고서와 자질구레한 잡화를 파는 서점. 한 마디로 흥미 유발이 안 되는 장소다. 나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아도 서점에 가는 걸 좋아한다. 서점은 반드시 다독가들만이 가는 장소는 아니므로. 그곳에 가면 그냥 좋다. 참 좋다. 책을 사지 않아도 책 표지만 구경해도 기분이 풀린다. 특히나 책 제목을 유심히 살펴보는 재미. 내용은 상관없다. 기발한 제목을 달고 유혹하는 책. 매대에 깔린 기상천외한 제목의 책을 볼 때면 웃음이 저절로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고 서점에 가서 책을 구매하는 일은 드물다. 그냥 한 번 훑어보고 나오는 때도 빈번하다. 제목을 들여다보다가 확 끌리는 책이 나오면 몇 페이지 읽는 재미도 그중 하나다. 그렇다. 모든 글쓰기 책에서 공통으로 말하는 한 가지.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제목'이다. 제목을 잘 붙여야 팔린다. 뭐 제목이 다인 책도 있지만 잘 지은 제목은 눈에서 그치지 않고 손으로 전달된다. 방문객의 손을 조종한다. 손은 결국 지갑으로 향하고. 지폐나 카드를 꺼내게 한다. 이 때문에 나는 책의 제목을 살펴본다.
다시 하얀 서점으로 돌아와서. 이 책방에 드디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걸었기 때문에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그 하얀 문을 열 수 있었다는 사실. 내가 상상했던 그 이미지였다. 규모는 작지만, 서점 주인의 안목은 한없이 커 보였다. 전시된 책들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나 노란색 포스트잇으로 책 표지에 붙여놓은 문구. 책에 관한 짧은 서평이 즐비했다. 서점에 가면 가장 고민스러운 것이 바로 책 고르기다. 수많은 책 중에서 도대체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고민 아닌 고민을 하게 되므로. 이 하얀 책방은 달랐다. 한 자 한 자 연필로 눌러쓴 감상평이 책을 사라고 유혹하는 느낌. 이 집 주인장의 배려 혹은 상술이라 해도 좋다. 이 정도 책에 관한 전문가라면 서점을 운영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갖가지 책만 나열한 것이 아닌, 손수 책장을 넘기며 읽은 책을 소개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도 전시되어 있으니 더욱더 좋았다.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이라든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라든가, 요즘 읽으려고 하는 황현산 작가의 [밤이 선생이다] 등등. 내가 아는 제목이 눈에 들어와 더 반갑고 즐겁다. 들어가서 안쪽 코너 한쪽 책상에 놓인 수첩에 방문객의 메일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 서점의 새로운 소식을 듣고 싶은 사람은 메일을 남겨달라는 문구가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펜을 집어 들었다. 수첩을 한참 넘기고 나서야 빈 곳이 나왔다. 이렇게 작은 서점인데도 많은 사람이 메일 주소를 남겨놓고 간 것이다. 나도 그 아래 여느 방문객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흔적을 새겨본다.
걸으니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오게 됐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제 대한민국 서울에 이런 대피소가 마련됐다. 양재역으로 올라가는 대로변. 한겨울 추위를 피하라고 만들어놓은 대피소인 줄 알았다. 내 예상은 엇나갔다. 투명한 삼각형 지붕에는 빨간 글씨로 '미세먼지' 녹색 글씨로 '대피소'라고 쓰여 있다. 가만히 안을 살펴보니 공기청정기인 듯한 물건이 나무 상자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이 대피소가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공기청정기에 묻은 시커멓게 눌러앉은 먼지만 보더라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제대로 관리도 안 되는 공기청정기로 상쾌한 공기를 생산할 수 있을까. 그래서일까.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도 내 코나 폐로 들어가는 미세먼지를 막아줄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일까. 사람들을 위해 만들었지만 사랑받지 못하는 애물단지. 상대방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짝사랑. 이곳에 상쾌한 공기가 있으니 어서 들어오세요. 바깥보다 쾌적한 공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외쳐봐도 그나 그녀에게는 도달하지 않는 것 같다. 이래선 짝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양재역 근처 공중전화 박스. 눈에 익은 전화기 한 대가 놓여 있다. 우리 회사 내 책상에 있는 전화기. 바로 그 전화기와 똑같다. 공중전화가 있어야 할 자리에 사무실에서나 볼 수 있는 전화기가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수신자 부담 전화' 일명 콜렉트콜.
전화기에 유성펜으로 갈겨쓴 '수신자 부담 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누구의 아이디어였을까. 대로변에 사무실 전화기를 가져다놓다니. 재밌기도 하면서 의아했다. 보통 바깥에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할 수 없는 물건이라서. 대부분 이런 전화기가 있어야 할 곳은 건물의 내부, 그것도 사무실 안에 어딘가의 책상 위에 있어야 할 물건.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장면을 만나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찰칵' 먼저 사진 한 장 찍고 본다. 살면서 수신자 부담 전화를 사용해본 기억은 없지만, 이 전화만큼은 수화기를 한 번 들어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무엇보다도 친근감이 들어 부담 없다. 설비된 시설 자체는 어설프고 난데없지만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싶어진다. 내가 늘 사용하는 전화기라서. 내 책상 위에 있는 물건 같아서. 아무 거리낌 없이 말이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수신자 부담 전화기는 대부분 낯설었다. 조금 더 기계적이고 외부 충격에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진 투박한 장비라는 개념이었다. 일견 공중전화 자리에 어울리지 않을 사무실 전화기 한 대. 여차하면 누구라도 쉽게 떼갈 수 있는 취약한 보안. 하지만 이곳은 누군가의 위트가 느껴지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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