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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아저씨, 3일

일상/하루하루

by gyaree 2019. 4. 24.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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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지 않아! 더 걸어야 해! 이게 뭐라고. 너는 그냥 걷는 것뿐이라고. 

투정부리지 말고 걸어!

 

주말 토요일. 쉬는 날이라 걷기도 하루 쉬어볼까 하는 게으른 생각이 들었다. 이틀 걸었더니 발목도 욱신. 예전에 접질린 오른쪽 복숭아뼈도 뻐근하다. 귀차니즘도 발동하고 피곤하니까 발이 안 떨어졌다. 생각이 몸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갈팡질팡하다가 저녁때가 돼서야 억지로 집에서 나왔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톡 하고 눈 밑을 때린다. 살갗에 부딪힌 그 작은 빗방울이 산산이 부서져 얼굴로 튀어 오른다. '반갑다 빗방울아!' 솔직히 반가운 빗방울이었다. 이대로 비라도 내리면 걷지 않을 핑계가 생기므로. 몇 방울 눈가를 때리더니 폼만 잡고 마는 하늘. 하늘에 기댄 바람은 단 몇 방울의 비로 끝나버렸다.

 

'아! 걸으라고 하늘도 나를 떠미는구나.'

 

저녁 8시 30분. 오늘로 3일째 걷는다. 걷지 말아야 할 핑곗거리가 없다. '왼쪽 정강이도 욱신거리는데 오늘은 쉴까. 아니야 고작 이틀밖에 안 됐잖아. 걷기로 해놓고 겨우 이틀이다.' 이놈에 쑤시는 다리가 좀처럼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오늘은 그냥 집으로 들어가라고 피곤한 다리가 꼬신다. 그 꾐에 뇌가 즉각 반응한다. 걸을까 말까? 잠시 고민. 허리도 이때다 싶어 덩달아 소리친다.

 

"나도 이제 나이 먹어서 피곤하다고. 이보게 주인 양반! 허리가 휠 거 같아. 오늘은 그냥 집으로 들어가지."

 

내 몸에서 이렇게 아우성친다. 하정우처럼 걷기로 해놓고서. 이런저런 구실을 갖다 붙인다. 그 와중에 마음은 그나마 올바른 소리를 낸다.

 

"하정우! 하정우 어디 갔어? 하정우처럼 걷는다며!"

 

마음은 피곤한 다리와 허리, 게으른 뇌를 꾸짖었다. 마음의 굳건한 외침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덕분에 걷고 싶지 않다고 발뺌하는 게으름을 억지로 제압하고 걷기 시작했다.

 

 

 

궂은 날씨 탓에 역시 양재천에는 사람이 안 보였다. 욱신거리는 정강이가 말했다. 

 

"거봐! 아무도 없잖아. 이런 날씨에 누가 걷냐고. 봐봐. 앞에 아무도 안 보이잖아. 너무 컴컴해. 괜히 객기 부리지 말고 들어가자고."

 

밑에서 절규하는 다리의 하소연을 무시한 채 나는 계속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조용히 걷는데 야속하게도 빗방울이 점점 잦아졌다. 머리와 다리, 허리를 겨우겨우 설득시켜 여기까지 왔건만. 또다시 세 녀석이 투정 부리려던 찰나였다. 저 멀리서 시커먼 물체가 보였다. 이쪽으로 오는 건지 가만히 서 있는 건지 움직임이 아주 둔해 보였다. 그러나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다가왔다. 트랙에는 그 물체와 나, 단둘밖에 없었다. 거리는 좁혀졌다. 리어카를 끄는 아저씨였다. 그 안에는 종이 박스와 고철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운동하는 양재천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자전거, 전동 스쿠터,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아이들 킥보드. 이렇듯 이곳은 건강과 놀이를 떠올리게 하는 장소다. 대충 이런 장면이 그려지는 곳이다.

 

'저 리어카가 어디서 나왔을까. 하물며 이 근처에는 고물상도 없는데'

 

머리 위 허공에는 물기가 만져질 듯이 빗발도 조금씩 힘을 가했다. 무거운 리어카를 끌고 가는 아저씨의 뒷모습. 힘들게 천천히 회전하는 찌그러진 고무바퀴는 나의 지친 다리보다도 게으름 피우는 머리보다도 힘들어 보였다. 그제야 아프다고 칭얼거리던 다리와 허리, 머리가 어느새 침묵을 지켰다. 나는 힘들면 되돌아가면 그만이지만 아저씨의 리어카는 달랐다. 아마도 저 리어카에 어딘가에 버려진 고물을 더 담아서 바퀴는 돌아갈 것이다. 끙차! 끙차! 있는 힘을 다하지만 아주 느리게 말이다. 힘들다고 어리광 피우는 자신이 쑥스러워졌다. 더군다나 나는 맨몸으로 걷고 있지 않은가. 그 리어카를 보고 있노라니 나의 고단함은 하나도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리어카와 마주친 뒤 다리와 머리, 허리는 더는 투정하지 않았다.

 

세상은 악조건에서도 투정 부릴 여유도 없이 묵묵히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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