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나영의 보이스 플러스 유튜브에서 [걷는 남자, 하정우]를 들었다. 맞다 우리가 아는 그 배우, 일명 하대갈. 하정우다. 절대 비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책에서 별명이 하대갈이라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자신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의 걷는 이야기가 담긴 에세이. 걷는 것으로도 책을 출간한다니 놀라웠다. 누가 보더라도 힘든 마라톤이나 철인 삼종경기처럼 뼈 빠지게 힘든 스포츠 정도는 해야 할 말이 있고 쓸 이야기가 있을 줄 알았다. 그 두 스포츠야말로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이 가능하기에. 그런 역경을 이겨냈을 때만 무언가 타인에게 말할 거리가 있을 거라고 편협한 생각이 자리 잡았었다.
뭐! 걷는다고? 걸어서 무슨 할 얘기가 그리 있을까?
남들도 다 걸어 다니는데. '나도 걸어 다닌다고' 그의 걸음과 나의 걸음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명확했다. 적는다는 행위. 하루하루 걷는 일상을 노트에 남겨놨다는 차이였다. 그에 비해 나의 걸음은 그냥 걸어 다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 안에는 건강을 위한다는 목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한 것처럼 나는 어딘가에 기록을 남겨두지 않았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 버리고 내가 한 행동과 감각은 잊히거나 사라졌다. 내 머리 어딘가에 들어가 있을 그동안의 행적들은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겠지. 내가 원할 때 원하는 장소에서 꺼내어 볼 수 없는 기억. 돌아보니 아깝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수많은 시간들이 어지럽게 꼬인 실타래처럼 좀처럼 풀어낼 수 없는 상태. 비단 내 걸음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의 뇌에서 허무하게 지워진 추억들. 그 시간이 아픈 경험이었든 좋았던 경험이었든 오래된 과거는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이 없으니 스스로를 성찰할 기회조차 없다. 나의 뇌는 검색하면 무엇이든 찾아내는 구글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도 오늘부터 적는다. 기록으로 남긴다. 허접한 글이라도 쓴다. 어딘가에 발자취를 찍는다. 그냥 흘러가버리는 삶이 아까워서.
하정우는 왕발이다. 신발 사이즈가 무려 삼백 밀리미터라고 하니. 보통 신장이 2미터는 돼야 발 사이즈가 그쯤 될 텐데. 하정우는 머리도 큰만큼 발도 그에 못지않다. 때문에 그는 더 잘 걷는다고 말한다. 발이 커서인지 매일 걷는 걸음이 자그마치 삼만 보. 삼만 보라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도 조금은 걷기에 3만 보라는 걸음의 대단함을 안다. 하루에 만 보만 걸어도 건강에 좋다는 통설에 그보다 세 배는 더 걷는다니. 하정우의 발이 큰 이유가 있었다. 나의 키가 177센티미터에 발 사이즈는 265밀리 미터다. 내 걸음으로 12,580 보를 걸었을 때 대략 9.18킬로미터 정도 표시된다. 이걸 시간으로 바꾸면 2시간 남짓. 어림잡아도 3만 보면 30킬로미터를 하루에 걷는다는 소리다. 그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이 하루에 30킬로미터 정도 걷는다고 했는데. 그 3만 보라는 소리에 사라졌던 승부욕이 환생했다. 나도 걸으며 도시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상상해본다. 평소에 7-8,000 보, 많은 날은 18,000 보도 걷기에 충분히 자신감은 있다. 그냥 걷는 것이 아닌 나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걸어보려고 한다. 돈이 안 들기에. 나처럼 돈 없는 사람에게. 나처럼 낯을 가리는 사람에게. 나처럼 친구가 많지 않은 사람에게. 나처럼 삶을 돌아볼 사람에게. 나처럼 사색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처럼 운전도 못하는 사람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건 그래도 멀쩡한 두 다리. 나이 들어 삭기 전에 나의 다리를 이용해 보고 싶다. 나의 다리로 걷기로 해본다.
과연 나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하다. 걷는 남자, 하정우의 책 때문에 더 궁금해졌다.
오늘 아침, 평소보다 20분 빨리 집에서 나왔다. 튼튼한 운동화로 갈아 신고서. 아무래도 긴 거리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매일 신던 단화보다는 운동화에 손이 갔다. 신발장에 꼭꼭 숨겨놓은 검은색 운동화. 나는 신발 하나만 주야장천 신고 다닌다. 이게 닳고 닳아 헤질 때까지 신고 못 신을 정도까지 됐을 때 새 신발로 바꾼다. 오늘이 아니었으면 신발장에서 새 신을 꺼낼 일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하려면 그에 걸맞은 새 장비도 필요하다. 작가들은 글을 쓰기 전에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놓고 시작한다고 했다. 뭐 글을 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새로운 마음을 세웠으니 나도 따라 해 본다. 나의 장점을 한 가지 말하자면 '빠른 시작'이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시작하고 본다. 페이스북의 CEO 마크 저커버그가 이런 말을 했다.
"시작할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이디어란 게 처음부터 완성된 채로 나오지 않아요. 실행하는 과정을 통해 명확해집니다. 그래서 무조건 일단 시작하는 게 중요합니다."
다만 한 가지, 지구력이 모자란다는 사실. 밀고 나가는 힘이 약하다. 그래도 시작하는 것이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 나으니까.
아침에 양재천으로 걸어 나오니 내 옆으로 자전거가 쌩 소리를 내며 쏜살같이 달려 나간다. 아침부터 땀 빼는 저 사람도 참 대단하다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바로 10미터쯤 앞에 걸어가는 여자. 저 앞으로 서울시 따릉이 페달을 밟는 남녀. 조금 걷다 보니 전동 스쿠터도 지나간다. "아! 상쾌하다." 아침 공기가 이 정도로 상쾌했었나. 매일 마시고 사는 공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같은 산소를 들이마시는데 이처럼 다르게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아침이라서 그럴까? 도로에 빽빽이 쌓인 자동차가 보이지 않아 시야도 시원하다. 눈앞에 기계가 보이지 않고 풀과 나무와 꽃들이 걸리니 마음도 가볍다. 버스를 기다리며 끝이 안 보이게 줄지어 선 자동차의 이미지가 나의 일상이었다. 길을 막지 말라고 빵빵 눌러대는 경적, 조금이라도 먼저 가보겠다고 요리조리 차선 변경하는 차. 버스에 먼저 타려고 달려가는 아줌마. 떠나는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저 멀리 뒤에서 뒤뚱뒤뚱 뛰어오는 할머니. 이게 나의 아침 출근 내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다.
걷다가 생각지도 않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녀석을 만나는 순간 왠지 모를 웃음이 나왔다. "왜? 왜? 이런 곳에도 토끼가 있었어?" 풀이 드문드문 돋아난 파종지에 토실토실한 하얀 토끼 한 마리가 자기 다리를 뱃속에 감추고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양재천에서 여러 동물을 봤지만 토끼는 처음이다. 누가 기르는 토끼는 아닌 것 같았다. 주변에 사람이 없었으므로. 어디에서 왔을까? 누가 키우는 토끼인가? 궁금증을 일으키는 토끼 한 마리. 나의 상상력이 부족했던지 하얀 토끼와 마주하니 신기하다. 참새, 청둥오리, 잉어, 너구리, 비둘기, 학, 까치, 개구리, 다람쥐, 게, 개, 고양이는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동물이다. 어느 날 길바닥에서 게를 만난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이 토끼도 그렇다. 보통 토끼는 울타리 안에서만 봤기 때문이다. 누군가 기르는 토끼. 걷기 첫날 힘들게 한 걸음 한 걸음 쌓다 보니 의외의 장소에서 생각지도 않은 즐거움에 선물을 받은 것 같다. 내 소유물도 아닌데 내 손에 들어왔을 때 느낀 감정이랄까.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 또한 소중한 순간이라는 것. 눈으로만 담기에는 부족했을까. 담아두지 않으면 내 머릿속에서 또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워버렸을 것이다. 오늘은 이미지로 담아두고 글로 새긴다. 묵직하던 다리 근육에 활기를 불어넣는 하얀 토끼 한 마리. 가볍게 앞으로 나간다.
"하얀 토끼! 나도 너랑 더 놀고 싶지만 그러면 나는 회사에 지각이야. 오늘이 처음이거든. 회사까지 걸어가는 거. 그래서 빨리 가야 해. 너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어보지 못해 아쉬워. 내일도 만나길 바라."
이곳은 원래 야외 수영장이 있던 곳이다. 이 동네에도 점점 사람들이 늘어났다. 사람이 늘어난 만큼 자동차도 늘었다. 자동차는 도로가 필요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수영장을 허물었다. 어른들의 자동차가 달릴 길을 위해서. 수많은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재밌게 놀던 수영장. 아이들의 의견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그렇게 아이들의 놀이터는 사라졌다. 아이들이 뛰놀며 물놀이하던 공간은 사람들에 의해 바퀴가 구르는 차가운 도로로 바뀌려 한다. 아이들의 여름을 빼앗아가 버렸다. 뜨거운 여름이면 양재천 변을 따라 엄마 아빠 뒤를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던 길. 이제 그런 아이들의 모습은 볼 수 없게 돼버렸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길을 위해서.
4월이 오면 벚꽃은 사람들의 고개를 하늘로 향하게 하고 팬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땅으로 잡아당긴다. 하얀색, 노란색, 빨간색, 보라색 다채로운 색깔로 지나가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네이버에 물어보니 이렇게 나와 있다. '햇볕을 좋아하는 이 녀석들은 기온 10도에서 20도 사이를 제일 좋아한다. 영하 5도의 추운 날씨에도 견딜 수 있다.' 어쩌면 이리도 4월의 날씨에 어울릴까. 요즘 4월은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기도 한다. 갑작스러운 추위에도 시들지 않고 버티는 강인함을 지녔다니. 나는 봄의 꽃 중에서 팬지가 제일 이쁜 것 같다. 대부분 하나의 색깔만 가진 채 봄을 화사하게 꾸미지만 이 녀석들은 강렬한 색깔을 지녔다. 혼자일 때보다 같이 모여 있을 때 팬지는 더 아름답다. 진한 원색이 전해주는 상쾌한 팬지는 이미 생을 다한 벚꽃잎의 여운을 메꾸기에 충분하다.
걷다가 영동 4교의 교각 안으로 스며든 녹색 숲이 보였다. 순간 아름답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교각은 흡사 카메라의 프레임 같았다. 그 안으로 펼쳐진 나무숲.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존 스노우가 말 타고 달리는 숲속이 그려졌다. 다리에 셔터가 있다면 누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일었다. 지금 바로 이 장면을 오리고 싶은 마음. 아직도 회사까지는 멀었다. 걸음을 재촉해야 하지만 잠시 멈춤. 멈추지 않고서는 못 배길 광경이 펼쳐졌다. 나무의 이름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러나 이름표가 없는 나무. 아쉽다. 이름도 모른 채 좋아하는 짝사랑 그녀 같았다. 질서 정연하게 줄 맞춰 늘어선 나무. 바람이 어루만져 하늘거리는 녹색 이파리. 영화에서 봤던 환상적인 그 숲이었다. 고즈넉하면서 고풍스러운 자태. 이곳을 지난다면 꼭 한 번 바라보길 추천한다.
탄천 앞에서 길이 끊겼다.
안 가본 길, 처음 가는 길. 그 길의 끝은 알 수 없다. 길이 있을지 막다른 길일지. 나는 웬만하면 아는 길로 다닌다. 익숙함을 버릴 용기가 없어서다. 익숙하지 않으면 실수를 하고 당황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익숙함이 편하거나 편리해서 그러는 건 아니다. 다만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선뜻 용기가 나지 않을 뿐. 이제 이 탄천만 건너면 복잡한 도심 속으로 진입한다. 회사도 머지않았다. 이 다리만 건너면 된다. 다리 앞 커다란 교차로에 섰다. 순간 당황했다. 사람이 다닐만한 인도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자동차만 통과할 수 있는 널찍한 도로만 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 사방팔방 둘러봐도 길은 안 보인다. 사람이 건너갈 길을 만들어놓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인적이 없는 곳이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건너가야 한다. 자동차들은 쌩쌩 소리를 내며 달려나간다. 혹시나 길이 있을까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갔다. 좁은 샛길이라도 찾으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오른편으로 꺾어지는 도로는 더 넓었다. 신호등 하나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뻥 뚫린 도로. 인도는 없었다.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갈까 망설였다. 다리도 쑤시고 다시 돌아가려니 힘에 부친다. 어떻게든 이 도로를 건너야만 회사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던 탓이다. 가만히 건너편을 바라보니 그쪽은 길이 있어 보였다. 애초에 건너편으로 갔으면 됐을 것을. 삶이 그런 것 같다. 앞으로 가봐야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알 수 있다. 가보지 않으면 해결책도 없다. 처음엔 실수하더라도 어딘가로 통하는 길은 반드시 존재한다. 나도 이 길이 처음이라 두려웠고 과연 이 길로 가면 회사까지 갈 수 있을지 정답은 없었다. 그래도 걸었다. 걸으니 막힌 길이란 걸 알았다. 가로막힌 길 위에서 해결책을 모색했다. 나는 없는 길을 뚫었다. 조금 위험하지만, 도로를 가로질러 뛰었다. 자동차가 오지 않을 때를 살피며 있는 힘껏 다해서 뛰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봐야 새로운 길도 찾을 수 있다. 익숙함을 버려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내가 처음 회사로 걸었던 날, 벌써 여러 개의 깨달음을 얻었다. 걷기 첫날부터 너무 많은 수확을 올렸다.
이게 걷는 재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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