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먹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 오른편에 보이는 로또방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여섯 개의 숫자가 유리창에 붙어있는 복권 판매점. 잠시 망설이다 저절로 발길이 그쪽으로 움직인다. 발길을 그쪽으로 움직이게 만든 녀석은 다름 아닌 나의 잠재의식이다. 많은 사람이 그렇듯 나 또한 꿈이라는 녀석이 번호 여섯 개를 고르라는 신호를 보낸다. 흔히 말하는 돼지꿈이냐 아니냐를 떠나 그저 이상한 꿈을 꾸었을 뿐이다. 꿈에서 돼지를 본다고 해서 당첨되리란 보장이 어디에 있나. 5천만 국민이 꿈에서 돼지 한 번 안 본 사람이 있을까? 내 꿈에도 돼지는 많이 나타났다. 그때마다 복권을 샀지만 결과는 뻔했다. 그런데 오늘도 역시 복권방을 들어가게 만든 놈은 꿈이다. 꼬깃꼬깃 꾸겨 매번 쓰레기통으로 집어던지게 했던 그 녀석. 다시는 사고 싶지 않게 했던 그 녀석. 그렇게 당해놓고도 너란 놈에게 오늘 또 한 번 속아준다. 집안 대대로 고이 간직해 물려줄 한 장을 위해.
나처럼 매주 복권을 사지 않는 사람은 복권방에 들어가면 다시 한번 망설이게 된다. 기계에게 내 운명을 맡길 것이냐, 번호판에 내 손으로 칠할 것이냐.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봐선 꽝이 될 확률이 크다. 그렇다면 덜 억울하게 기계가 선택한 번호를 산다. 꽝이 돼도 기계 탓으로 돌릴 수 있으니. "기계가 번호를 잘 못 골라서 그런 거야"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참, 사람이 유치해지는 순간이다.
"자동으로 5천 원어치 주세요."
회사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 유튜브에서 주옥같은 발라드 모음을 골라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가을엔 역시 발라드.
살다 보면
하루하루
힘든 일이
너무도 많아
수많은 근심 걱정
멀리 던져버리고
왼쪽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권진원의 [살다 보면]이 흐른다.
"아! 맞다."
내가 오늘 복권을 산 원인은 그 녀석이 아니었다.
저 가사를 듣는 순간 복권을 사게 만든 것은 오롯이 꿈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복권을 사는 표면적인 이유는 당첨금이 많다는 것. 그래서 조금은 부자 근처에는 가볼 수 있다는 것.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 당첨금액만으로 부자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저 노래 가사처럼, 살다 보니 하루하루 힘든 일이 너무도 많다. 대한민국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지 않을까.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차이로 힘들지 않은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돈을 이용해 근심 걱정을 날려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돈이 있으면 웬만한 근심 걱정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구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돈으로도 풀지 못하는 근심 걱정거리는 얼마든지 있지만, 돈이 없어서 풀지 못하는 근심 걱정거리는 훨씬 더 많다. 채널을 돌리다 보면 경제적으로 힘들어 하루하루가 힘들고 근심 걱정이 쌓여만 가는 사람들을 뉴스로 접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와 나의 처지가 많이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가슴속 깊은 곳에 있음을 발견한다. 이런 것이 상대적 빈곤감 일까?
무일푼으로 시작한 결혼이 어느새 15년이 흘렀다. 시작부터 마이너스로 출발한 것이 그 마이너스의 간극을 메우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앞뒤 안 가리고 시작한 결혼은 근심 걱정을 생각하기엔 둘이 너무 어렸다. 젊은 두 남녀는 그저 둘이 같이 산다는 이유만으로도 좋았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뭐, 근심 걱정은 나중에 생각해도 되잖아!"
낭만적 연애의 연장선 상에서 신혼 생활은 흘러갔다. 하루하루 힘들긴 했어도 근심 걱정을 멀리 던져버리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시간이 더 흘러 아이가 생겼다. 그것도 한 번에 둘이나. 서서히 경제적인 압박감이 가슴을 조이는 시기가 시작됐다. 둘이 살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접어든 것이다. 작은 중소기업에서 받는 월급으론 가당치도 않은 생활비의 증가. 근심 하나 걱정 하나, 근심 둘 걱정 둘.... 이렇게 근심과 걱정은 나날이 쌀쪄간다.
또,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다. 아직도 작은 중소기업에 다니는 내 몸에는 나날이 살이 붙은 근심, 걱정이 큰 지방덩어리가 되어 한 몸이 된 것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다. 이렇게 켜켜이 쌓인 근심, 걱정 지방덩어리를 덜어내기 위해 이리저리 몸부림을 쳐본다. 항상 돈이 되지 않는 일에만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뿐. 쓸데없는 지방덩어리의 크기는 줄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녘. 꿈을 꾼다. 이상한 꿈이다. 흔히 말하는 돈이 된다는 꿈과는 거리가 멀다. 기분이 나빠 잠에서 깬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좋은 꿈은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 나도 어쩔 수 없는 요행을 바라는 하찮은 인간. 수많은 근심 걱정 멀리 던져버리기 위해 복권방을 찾는다. 행여나 그럴 확률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 기계에서 나오는 종이 한 장을 받아 들고 빠져나온다. 현실적으로 내 몸에 덕지덕지 붙은 근심, 걱정 지방덩어리를 제거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은 안다. 고이 접어 지갑 속에 집어넣은 숫자가 적힌 종이쪽지 한 장. 당첨이 되든 안 되든 이 순간만큼은 지방덩어리의 무게를 잊게 된다.
내 귓속으로 들어온 가사 한 줄. 복권 한 장이 해결해주리라는 기대는 안 한다. 그래도 가끔은... 아주 가끔은.... 무거운 지방덩어리의 무게를 덜어주는 기분이 들게 한다.
이 노래의 마지막은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란 꿈으로 산다'는 이야기를 한다. 나 또한 그랬으면 좋겠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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