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 아메리카노 한 잔

책 한 권 아메리카노 한 잔

집 근처 카페에 들어왔다.

월요병이 도지는 월요일. 

과감하게 월차를 사용한다.

아이들이 첼로 강습을 받는 딱 1시간 30분이 혼자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다. 이럴 땐 책 한 권을 들고 카페를 찾는다. 다행히 집과 가까운 곳에 카페가 있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3,000원을 내고 내게 주어진 자유시간은 길어야 1시간 반. 첼로 강습이 끝나면 아이들 케어 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후 3시 35분. 이곳의 주 고객은 삼성 R&D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다. 오늘은 그래도 손님이 조금 있는 편. 보통 창가 쪽 높은 의자가 있는 자리는 비어있는데 오늘은 한 커플이 앉아있다. 그 오른쪽 옆 구석탱이에 딱 한 자리가 비어있다. 하나로 이어진 폭이 좁은 나무 테이블과 높고 불편한 의자. 웬만하면 불편해서 잘 앉지 않는 자리다. 이 자리에 손님이 앉았다는 건 그래도 오늘은 장사가 된다는 뜻이다. 

 

나는 항상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달달한 설탕 맛을 싫어해 무설탕의 씁쓸한 그대로가 좋다. 오늘은 아이스로. 차가운 아메리카노 한 잔에 빨대를 꽂아 한 모금 빨아들인다. 입안으로 퍼지는 커피의 원두 향과 끝 맛의 달달함이 살아난다. 입안에서 목구멍으로 넘어가 뜨거웠던 식도를 차갑게 적시는 아메리카노 한 모금에 예전 생각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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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통

한동안 어금니가 아파 찬 것을 마시지 못했다. 그러니 한여름에도 핫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태어나서 치과라고는 사랑니를 뺄 때 한 번 가본 것이 전부다. 이가 튼튼하기도 했지만 치과 자체가 두려워 가지 않았다는 편이 맞는다. 아이들처럼 치과는 정말로 가기 싫은 병원 중 1위에 오른다. 어느 정도 아픈 것으로 치과를 찾는 일은 내 머릿속에 아예 저장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살다 보니 몸이 늙으니 이도 같이 늙는다는 사실. 튼튼했던 이가 조금씩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첫 증상은 이가 시리기 시작한다. 뭐 이 정도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나도 나이를 먹었으니 이가 시린 건 당연한 일이라 치부한다. 시린 정도야 조금 참으면 그만. 찬물을 먹을 때만 불편하니 아프지 않은 쪽으로 찬물을 넘기면 그만이다. 찬 음식을 먹을 때만 고통을 참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쓸데없는 생고집을 부려 치통을 참아낸다.

치과가 두려워 참고 참았던 치통. 이상하게 특히 더 아픈 시간대가 있다. 저녁 9시 30분이면 신기하리만치 통증은 시작된다. 이제 이가 시린 증상은 넘어선 지 오래. 아프다는 티를 내면 당장 병원에 가라는 아내의 불통이 떨어진다. 아래턱을 살짝 오른쪽 위로 엇갈리게 올리고 스으으 스으으하며 숨을 들이쉰다. 이러면 아픈 어금니가 아주 아주 쪼금은 통증이 줄어든 착각이 든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이 짓도 더는 통하지 않는 치통이 계속된다. 차가운 거실 바닥에 얼굴 한 면을 대고 누워 새우 자세를 취해본다. 이렇게 하면 치통이 사라질 거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지만 그래도 해본다. 어릴 때부터 아프면 내 몸은 저절로 새우처럼 동그랗게 말렸다. 이러면 좀 덜 아픈 느낌이 난다. 사실은 배가 아파서 저절로 몸이 말렸다는 것이 옳다. 치통은 아무리 내 몸을 말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고통은 치과의를 만나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고통의 한계를 넘어서면 겨우겨우 치과의를 만날 용기를 갖게 해준다.

 

썩은 어금니를 새 이로

치과 가기 싫어 버틴 몇 년의 시간은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치과 가는 게 뭐가 그렇게 무섭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치과를 가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더는 참기 힘든 고통으로 용기 내 찾은 치과. 마취 주사로 잇몸을 찌르는 느낌도 싫다. 자기 이가 아니라고 쇠송곳으로 마구 쑤셔대는 의사와 그 옆에서 이름 모를 연장을 준비해주는 간호사. 입은 내가 벌릴 수 있는 범위 최대로 벌린 채, 침은 질질 흐른다. 이잉하는 드릴 소리 만으로도 온몸이 굳어버린다. 이 상황에 그나마 버팀목이 되어 주는 건 악 잡은 내 두 손뿐이다. "손아! 고맙다." 흐느껴 울고 싶은 심정이다. 너무 세게 잡아 치료가 끝나면 열 손가락이 욱신거린다. 이렇게 4주간의 치료, 아니 대장간에서 빨갛게 달군 쇠를 망치로 때려 패는 듯한 처치가 끝난다. 그렇게 얻어맞은 쇠는 강철로 변하듯 새롭게 덮어쓴 내 이도 더는 이곳에서 와서 얻어맞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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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히 외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차가운 물만 들어가면 저절로 얼굴이 찌그러들던 말 못 할 고통의 1년. 한여름 35도의 날씨에도 아메리카노 뜨거운 거 주세요.라고 외쳤던 겁쟁이.

이제는 당당히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라 외칠 수 있다.

4주간의 치과 치료는 정말 악몽 같았지만 카페를 찾아 얼음이 담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자신감이 찬 목소리로 주문하는 보상을 받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추울 땐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더울 땐 차가운 아메리카노. 이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고마움을 느끼며. 책 한 페이지를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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