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7.5km를 걷기 시작한 지 서너 달. 이번 운동화가 세 번째다. 나의 불룩 튀어나온 뱃살이 조금은 들어갔을까. 운동화를 바꿔 신으며 배 한 번 쓰다듬어 본다. 첫 번째 운동화는 마찰의 여판지 뒤축이 무너지고 뜯어졌다. 두 번째 운동화는 내 발이 정말 편해서 맨발로 신고 걸어도 발이 아프지 않다. "오빠, 운동 좀 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와이프에게 들었지만, 그때마다 "나중에" "나중에"라고 되풀이만 했다. 그런 잔소리에도 끄떡없이 버티던 내가 스스로 알아서 운동을 시작했다. 뭐 단순히 걷는 것뿐이긴 하지만. 이런 내가 이뻤는지 걷기에 좋은 신발이 있다고 해외 직구로 바로 결재. 며칠 지나서 운동화가 왔다. 외견상 싸구려 느낌이 풍기지만 비싼 신발이라고 한다. 뭐 손 위에 올려 보니 아주 가볍다. 걷는 데는 제격이라고. 내 발에 제일 편했던 두 번째 운동화를 잠시 넣어두고 새 신발의 성능을 느껴보기로 했다. '네 놈이 걷는데, 얼마나 좋은지 한번 보자' 하는 심보로 아침 출근하면서 신고 나왔다. 새 신이라서 그런가 발 크기와 신발 사이즈가 딱 맞아떨어졌다. 운동화 안에서 발가락이 움직일 틈 없이. 이 정도야 조금 신다 보면 금방 적응하니 괜찮겠지. 일단 가볍고 좋은 착용감이라 할만하다.
아직은 적응 중.
새 신을 신고 걷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미 20년이 넘은 지금. 맞지 않는 신을 신고 즐거운 마음으로 즐길 수 없는 상황과 비슷한 처지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처음 이 업계로 발을 들였을 때는 신발의 사이즈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들어간 그곳에 발이 맞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쑤셔 넣어 적응하는 것이 우선이었던 시절. 지금도 신입 사원 면접관으로 많은 사람과 면접실에서 마주 앉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곳저곳 이력서를 집어넣고 있다. 자신이 하고 싶고 들어가고 싶은 회사를 따질 겨를이 없다. 어떻게든 들어가고 봐야 한다는 일념이 자기와 맞지 않는 옷이나 신발을 신으려 한다. 이런 젊은이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첫 직장을 구하던 시절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인간의 자존감은 거의 밑바닥이나 다름없었다. 남보다 떨어지는 스펙, 특별히 잘난 재능도 없고, 집안에 돈이 많아서 백수 생활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없는 그저 평균도 안 되는 레벨이라는 생각. 자존감이 생길만한 여지가 내겐 없었다. 그저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이 부럽기만 했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 한가득 짊어져 어깨가 축 늘어진 젊은이의 모습. 대기업에 입사할 스펙은 아니어서 사람을 구한다는 회사가 보이면 무조건 이력서를 집어넣기에 급급했다.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면접 보러 온 친구와 다를 바 없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이력서를 집어넣다가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없는 돈 긁어모아 양복 쫙 빼입고 출근했다. 그런데 그곳은 젊은이들의 지옥인 다단계 회사였다. 하루 출근하고 바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누구 하나 내 옆에서 조언해줄 멘토 없이 세상과 부딪치며 내게 맞는 새로운 신발을 찾아다녔다.
그래도 번듯한 직장이라 할 만한 첫 직장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곳. 지하 1층에 있던 사무실엔 생전 처음 보는 컴퓨터 장비들과 깨끗한 책상들. 뭔가 최첨단을 달리는 오피스의 모습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만으로도 이 신발이 나에게 맞건 맞지 않건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끼워 신어야 한다는 각오만 있을 뿐. 어렵게 합격증을 거머쥐었기에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다른 여건을 돌아볼 여유는 없다. 하루하루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나가며 나에게 주어진 업무를 실수 없이 처리하는 모습에 자신감이 붙기도 한다. 취직 전 바닥이던 자존감도 조금씩 올라가는 것을 맛볼 수 있는 희열감을 알게 되고 직장 후배가 생겨나고 나도 번듯한 선배 소리를 듣는 날.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온다. 나도 후배에게 무언가를 전수해줄 수 있는 지식과 어려운 일을 처리하는 노련함이 몸에 붙기 시작했다. 처음 입사했을 때 내 발보다 큰 신발을 신었던 기분이 서서히 신발에 내 발이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다. 내가 바라던 미래상과 맞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발은 아프지 않다. 하지만 회사라는 것이 나의 스킬이 올라가 작업의 생산성이 늘어나는 것에 비례해 처우가 개선되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헐거웠던 신발이 맞아 들어가던 날이 찾아오자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여유가 생긴다. 그동안 과다한 업무에 시달린 탓에 빠른 스킬 업은 달성했지만 나 자신을 돌아볼 틈은 없었다. 오로지 업무에 필요한 지식만이 큰 신발에 내 발을 끼워 맞출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써. 돌이켜 생각해보면 애초에 맞지 않는 신발에 우격다짐으로 집어넣은 건 아닌가 하는 질문에 솔직하고 빠른 답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에게 신발이 한 켤레뿐이라면 무조건 신어야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 신발이 작든 크든 헐어서 신기 힘들게 되더라도. 때로는 맞지 않는 신발도 신어야 할 때, 당연히 고통은 따른다. 그렇다고 맨발로 나가 유리조각을 밟기라도 한다면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 어찌 보면 애초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지 않는 것이 현명할 수도 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맞지 않는다면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서는 것도 나쁘다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것은 나에게 맞는 일인지 아닌지를 아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리고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맞지 않은 신발을 신고도 계속 걸어야만 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오랜 시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에게 맞지 않은 신발을 신고도 많은 월급을 받는다면 그런대로 신고 살아간다. 젊었을 때야 그 신발에 맞추기 위해 여러 가지 자신의 능력을 키워 발에서 신발이 벗겨지지 않게 한다. 직장 생활이 길어지고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늘어나면 신발 사이즈 논쟁은 불필요해진다. 새로운 신발을 신을 용기는 자꾸 사라지고 낡고 헐어빠진 신발이라도 신을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의 덩어리는 점점 커진다. 겁쟁이라 부르는 소리가 자신의 내면에서 수도 없이 반복된다. 용감한 자로 변신하고 싶지만, 현실은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시답잖은 변명만 늘어간다.
이제는 회사를 다닌지도 20년이 넘게 흘렀다.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업무 내용도 바뀌었다. 지금의 나에게 주어진 업무가 100% 나와 맞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아니 그 반도 안 될지도 모르겠다.
과연 "지금 내 직장은 내 몸에 딱 맞는 신발 일까?" 이 질문엔 자신 있게 답을 할 수가 없다. 겁쟁이 일까?
와이프가 새로 사준 걷는데 제일 좋은 운동화 한 켤레. 너무 딱 맞아 불편하고 걸으면 힘들다. 그래도 인생이란 때론 맞지 않는 신발도 신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살아보니 알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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