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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아저씨, 8일

일상/하루하루

by gyaree 2019. 5. 3.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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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내 우산을 빼앗으려고 해

2019.4.25 / 22,409보


 

 

하늘과 비와 나그네

탄천교(우)

며칠 걷다 보니 걷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생각. 오늘 날씨 괜찮나. 미세먼지는 없는지, 비 소식은 없는지. 걷기 위한 외부 조건을 체크한다. 이 두 가지가 걷기를 방해하는 장애물이라서. 매일 날이 밝았으면 좋겠고 하늘에 미세먼지가 없으면 좋겠고 우산이 필요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잦아드는 아침이다. 회사까지 두 시간 넘게 걸어야 하므로 비가 내리거나 먼지가 많은 날은 이 도시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아니 대한민국 전체가. 내가 걷는 두 시간 동안만이라도 맑고 깨끗한 날씨를 기대하는 건 너무 탐욕일까. 하루 종일 비가 내려도 좋지만 딱 내 두 시간만 맑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자연이 내 마음을 알 리 없다. 자기들 마음이다. 마음대로 비를 뿌렸다가 마음대로 먼지를 몰고 왔다가. 내가 선택하거나 고를 수 없는 존재다. 자판기처럼 골라 먹고 싶은 캔을 고르는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하늘에 주문한다.

 

"자! 오늘은 기분이 꿀꿀하니까, 맑은 날씨야! 맑고 청명한 날씨라고! 비 뿌리지 말라고!"

 

거리의 흔한 자판기처럼 동전을 밀어 넣고 기분에 따라서 버튼을 눌러 아침 햇살을 꺼낼 수는 없는 일이다. 자판기 아래 구멍으로 또로로 구르는 소리를 내며 아침 햇살이 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마시고 싶은 캔 음료수처럼. 그 대신 나는 오늘 신발장에서 3단 접이 우산을 꺼냈다. 고맙게도 날씨는 우산을 펴지 않게 해 줬다. 자판기처럼 고를 수는 없지만, 우산을 펴지 않은 것만도 어디야. "감사해! 하늘" 하늘은 그래도 계속 겁을 준다. 구름 뒤에 해를 꽁꽁 숨기고 보여주지 않았다.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면서. 어디선가 자꾸 희뿌연 구름을 데려오더니 우중충한 표정만 짓는 거야. 내 몸에 언제라도 빗물을 내리꽂겠다는 기세로 말이지. 나는 그래도 꿋꿋이 걸었어. 고맙게도 탄천교 앞까지 우산을 접은 채로 걸었어.

 

그런데 하늘이 슬슬 시동을 걸더군. 심술이 났던지 바람을 내려보냈어. 처음엔 선선히 불더니 조금씩 세차게. 나는 오히려 시원해서 좋았어. 안 그래도 등에 땀이 찾는데 심술부리는 하늘의 바람이 고마웠어. 걷지 않으면 쌀쌀할 날씨인데 나는 아주 시원했거든. 하늘은 더 심통 부리며 바람까지 거세게 휘몰아쳤는데. 나는 더 불어주길 기대했지. 내가 내심 좋아하니까 이번엔 단단히 화가 났나 봐. 하늘의 얼굴색이 점점 빨리 어두워지는 거야. 탄천 위에 높게 떠 있는 이 다리 위에는 바람을 막아줄 공간이 없었어. 갑자기 바람이 세지더니 굵은 빗방울을 쏟아부었어. 나는 어쩔 수 없이 우산을 폈어. 강한 바람을 막아줄 곳 없는 뻥 뚫린 다리 위에서 우산을 꽉 움켜잡았어. 못된 하늘의 장난에 우산이 꺾이지 않도록 말이야. 우산은 펄럭펄럭 소리를 냈어. 내 두 손엔 힘이 꽉 들어갔지. 문득 어릴 때 읽었던 동화가 생각났어. 바람을 불어 나그네의 옷을 벗기려던 구름과 뜨거운 햇살로 옷을 벗기려던 해의 이야기. 결국 그 이야기에서는 해가 이겼지. 나도 성깔 부리는 하늘에게 지고 싶지 않아 우산을 있는 힘껏 잡았지. 순간 정말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 높은 다리 한가운데에서 나와 하늘 단둘이서 장난을 치고 있다는 생각. 이 주변에는 원래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니. 아침에 홀로 걷는 나그네와 하늘의 장난이랄까. 혼자 걷고 있지만 왠지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 내 우산을 꺾어보려는 하늘의 장난이 즐겁더라고. 내가 즐거워하는 것을 질투했던지. 신기하게도 하늘은 금세 비를 멈췄어. 정말 거짓말처럼. 다리를 건너가기도 전에 우산을 접었지. 하늘과의 사투에서 내가 이긴 느낌이 들었어. 왠지 뿌듯하기도 하고. 

 

"하늘! 오늘 즐겁게 해 줘서 고마워. 끝까지 비를 뿌리지 않아서 고맙고. 재미있었어."     


 

왼쪽 나무쑥갓 / 오른쪽 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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