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사회 어느 영역에서든 세상을 점말 의미 있게 바꾸기 위해서는 원래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들의 열광보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수긍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주장을 펴야 한다고 봅니다. 판결도 마찬가지지요.
한 마디로 유쾌, 재미, 감동이 담긴 책이다. 현직 부장 판사의 어찌 보면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쉽고 위트 넘치게 풀어써 아주 마음 가볍게 읽히는 책이다. 요즘 세태에 법원 판사들에 대한 불만들이 많다. 흘러나오는 뉴스만 보더라도 판사의 판결이 정말 합당한 것인가? 법을 모르는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판결들이 이어서 나온다. 법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들만의 이상한 판결은 피로감을 준다. 같은 법조인들조차도 도주의 의심과 증거를 은닉할 우려가 충분한 사람들이 권력의 비호 아래 풀려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짜증이 날 정도다. 이미 판사들에게 어떤 기대감도 하지 않게 하며, 그들이 일반인과 권력자들의 사이를 더 벌려놓는 느낌을 받게 한다. 이런 와중에 이 책을 만났다.
[판사유감] 저자 문유석은 현직 부장 판사다. 수많은 재판을 하며 각양각색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는 청자(聽者)로서 경험한 것을 적은 글이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판사가 아니라 그들의 고민을 듣는 상담가라는 인상이 들 정도다. 일반 사람이 볼 때 경악을 금치 못할 죄를 저지른 인간일지라도 판사의 입장에서 형벌을 내리는 상황에서는 많은 것을 고민하고, 혹시 모를 잘못된 판결로 한 인간을 망치지는 않을지 수많은 자료를 검토하고 공부하는 판사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글이다. 재판장에 선 가여운 사람들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고 두 손을 꼭 잡아주는 판사, 잘못된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어른들을 혼내는 호통 판사의 모습을 보며 그래도 약자에게 편이 되어주는 판사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책이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의지할 곳 아무 데도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에 판사 앞에 섰다. 다행인 것은 그들을 따스하게 감싸는 판사도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국민이 느끼는 법감정과 판사들의 법감정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최근에 와서 더 간절하다.
이 책의 저자는 세상을 정말 의미 있게 바꾸기 위해 자신과는 반대되는 사람들의 의견을 제대로 경청하며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판사라서 죄인을 벌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을 의미 있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말이 고맙다. 어찌 보면 사회의 최상층에 있는 지위를 가진 자로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의식보다는 출세나 잘못된 권력을 행사하는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것이 고맙다.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사람들을 돈과 권력자로부터 구원할 사람은 그들뿐이니까.
"사채업자가 깡패를 보내서 돈 갚으라고 협박할 때는 어떻게 해야 돼요?", "교통사고로 사람을 치어 다치게 했는데, 물어 줄 돈이 없으면 몇 년이나 감옥에 있어야 해요?",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서 감옥에 가면 빚 다 갚을 때까지는 못 나오는 건가요?"
보육원으로 봉사 활동을 나간 이 책 저자의 직업은 판사다. 그곳에 있던 아이들은 부모 없이 버려진 아이들부터 부모는 있지만, 아이들을 키울 사정이 안 돼 맡겨진 아이들이 같이 모여 사는 시설이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시작된 아이들의 쓰라린 이야기. 저자는 판사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얘기해준다. 그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자신들의 부모가 걱정돼 물어보는 질문들. 즐거운 기억들로 충만해도 모자라는 것이 어린이건만. 오히려 판사인 저자에게 나쁜 상황에 처한 부모를 걱정하며 어떤 방법이 있을지 묻는다. 돈 때문에 부모가 힘든 상황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 이 이야기를 듣는 저자나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나 같은 마음이 들었을 것 같다. 협박당하는 부모를 보는 심정, 돈이 없어서 감옥에 가야만 하는 부모를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순간들의 기억이 있는 아이들의 마음속엔 무수한 질문이 있었을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것에서 벗어나 부모와 같이 살 수 있을지. 저자는 그래서 아이들에게 대충 둘러대듯 말하지 않고 어른에게 상담하듯이 자세한 이야기를 해준다. 내가 판사였어도 그가 한 것처럼 아이들이 알아듣든 그렇지 못하든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을 것이다.
제가 보기에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파산자들의 종류는 대체로 세 가지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자기 가족이 빠듯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을 가까스로 충당하다가 실업, 질병 등의 이유로 감당할 수 없게 된 사람들, 조금이라도 잘살아 보고 싶어서 돈을 벌어 보려고 이것저것 애쓰다가 망해버린 사람들, 자기도 자기 앞가림만 겨우 하는 처지에 그놈의 '정'과 '핏줄'에 매여 있는 한민족으로 태어난 죄로 부모형제, 친지의 빚보증을 어쩔 수 없이 섰다가 같이 망한 사람들.
파산 신청. 요즘 이 단어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낭비하는 삶을 산 것도 아닌데 늘어나는 빚만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저 단어가 떠오른다. 본격적인 빚의 축적은 이제 시작도 하지 않았건만.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들어가면 더 많은 빚에 짓눌릴 텐데 벌써 '파산'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다. 그냥 회사만 다녔을 뿐인데 남는 건 빚이 전부인 인생이다. 빠듯하게 살아가는 데 갑자기 감당하지 못할 우환이 닥치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판사가 생각하는 우리나라 현실 파산자들의 면면은 개으름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모두가 열심히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빚이 쌓이고 결국엔 파산으로 빠지는 사람들. 이런 부류에 나도 끼어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발버둥 쳐본다. 파산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시원하게 돈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빚으로 빚을 막고, 카드로 카드를 막으면서 겨우 이자나 갚다가 그나마도 못 갚고,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에 쫓겨 다니는 시시포스의 운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활하고 못된 지혜로 가득 찬 시시포스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 저승에 간다. 그곳에서 저승의 신 하데스를 속인 죄로 산 정상으로 무거운 바위를 나르는 형벌을 영원토록 받게 된다.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린 돌은 다시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이 행위는 무한 반복된다. 시시포스는 신을 속인 죄로 형벌을 받지만 우리 시대의 평범한 가난한 샐러리맨들은 무슨 죄를 지었을까. 카드로 카드를 막는 삶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됐다. 뫼비우스의 띠같이 종착 지점도 출발지점도 없는 빚의 연결고리. 시시포스처럼 죄라도 저질렀다면 억울하지도 않을 텐데. 그냥 주어진 삶을 남을 속이면서 살지도 않았건만 이자를 막아보려 또 다른 카드를 만들고 있다.
제가 본 세상의 이치에 따르면 누군가 나에게 권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남들이 한사코 감추고 있는 일입니다.
맞는 말이다.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좋은 정보를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익이 되는 일을 뭐하러 남에게 줄까. 이런 자본주의 경쟁 세계에서. 그런 이들은 대부분 사기꾼이라 보면 된다. 그런데 이런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스스로 힘겹게 돈을 벌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쉬운 방법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보니 망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마지막에 손을 대는 곳은 놀음판이나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도박판밖에는 없다. 내 주변 가까이에서 평생을 봐왔기에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정말 돈이 되는 일은 말하지 않고 감추고 있는 걸 모르고 제대로 된 가치관이 없는 나약한 사람은 그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다.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정말 한스럽고 절망적이라는 것을 본인은 모른다. 아마도 알면서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두가 어느 정도 이상 잘살게 되는 것만을 사회의 목표로 삼게 되면 그 힘든 목표가 도달될 때까지는 대부분의 사람이 불행하다. 빈부 격차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자신의 상태에서 지금 당장보다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아귀의 허기처럼 충족될 수 없는 물질적 욕구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다른 행복의 가치를 일깨워야 한다.
어느 정도 이상 잘사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인생에 빚만 없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솔직히 이 목표가 달성되기 전까지는 불행할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이 목표가 달성되면 행복해질까? 라는 의문은 남는다. 빈부 격차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다른 것에서 그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빈부의 격차는 사라지지 않는다. 없앨 수도 없고. 그렇게 벌어진 차이 속에서도 행복을 찾는 일은 각자가 개인 알아서 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든다. 빈부 격차가 심하더라고 누구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까지는 희망하지도 않는다. 그로 인해 절망감에 빠져 허우적대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사회는 소수만이 승자가 될 수 있는 경쟁이 아닌 모두가 누릴 수 있는 다양한 행복의 가치를 존중해야 합니다.
지금 현재 나를 짓누르는 빚이 많지만, 가족들과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는 잠시나마 빚에 대한 억눌린 감정은 사라진다. 행복이란 복잡하거나 먼 곳에 있는 건 아닌 듯하다. 바로 내 옆에 있는데 그걸 찾으려고 하지 않고 찾는다고 해도 행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당연한 것이라고. 그런데 그 소소하고 당연함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을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호통은 담임선생님에게도, 부모님에게도 가차없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부모 있는 애들 말고 부모 없는 아이들 재판받을 때 법정에 한 번이라도 와 보신 적 있습니까? 학교에서 힘 있는 놈들은 살아남고, 힘 없고 부모 없는 애들은 쫓겨나고. 보이는 것만 보시잖아요. 보이지 않는 걸 봐야지!"
호통 판사의 호통 치는 영상을 유튜브에서 봤었다. 잘못을 저지른 일진 아이들에게 죄를 묻기 전에 잘못을 감추려거나 모른 체하는 어른들을 꾸짖는 모습에서 진정한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작 학생의 스승인 선생은 나 몰라라 하고 그의 부모들은 폭력을 가한 자식들이 아무 문제 없다는 식의 태도에서 이 호통 판사는 그들에게 벌을 내릴 수는 없어 호통을 친다. 보이는 것만 보려 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걸 봐야 한다고. 아이들의 잘못을 보고도 벌주지 않고 감추는 것은 그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 더 큰 죄악을 저지르게 하는 지름길을 알려 주는 것과 똑같다. 사회가 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다 보니 힘없는 소시민들은 그 힘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 학교의 선생을 통해 알 수 있다. 자신이 나섰다가 자기 자신이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 피해를 입어도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내가 약자의 편을 들어봐야 소용없다는 논리가 우리 사회에 시대 정신으로 자리 잡아서는 안 될 텐데. 자꾸만 그런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한편으론 이런 호통 판사가 있다는 것에 조금은 위안이 된다. 남의 자식이 아닌 바로, 나의 자식도 피해를 입어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만 잊지 말자. 그때 힘 있는 부모의 자식들만 벌을 받지 않는 광경을 목격한다면 얼마나 억울할지.
판사로서 가혹한 처벌보다 절도와 폭행을 저지른 소녀에게 엄마와 같은 심정으로 따스한 말 한마디가 이 소녀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지 않을까. 이런 판결문을 보는 우리가 오히려 큰 울림과 가슴을 울컥하게 한다. 잘못에 대한 죗값이 처벌만이 아니라는 것을. 집단 폭행을 당하고 삶을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었던 소녀에게 자존감을 일깨워주는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너야!"라고 말하는 사람. 죄를 심판하는 판사가 아니라 나와 제일 가까운 엄마가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마음 같아선 꼭 안아 주고 싶다는 말. 소녀에겐 쓰레기 같던 세상이 이 한 마디로 조금은 다른 세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정성', '성실' 같은 평범해 보이는 가치를 우리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당연한 문화인 것이죠. 교수들도, 학사 행정을 담당하는 직원들도, 도서관의 사서들도, 스쿨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들도 다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 것 같습니다. 밥벌이를 하려고 마지못해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저자가 느낀 그들의 가치관은 거창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정성을 다하는 것, 모든 일에 성실한 자세로 임하는 것,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문화였다고 말한다. 언뜻 들어도 정말 평범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내가 그들의 생활을 겪어보지 못해 저자의 말을 100% 신뢰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이 말에는 공감이 간다. 밥벌이를 하려고 마지못해 하는 우리들의 자화상.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겠다. 한 가정의 생계 수단으로써의 직업, 내가 다니고 있는 직장이 그저 밥벌이하기 위한 곳으로 바뀐지 오래 된 것 같다. 이 모든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고 나의 책임이다. 단순한 밥벌이가 되기 전에 미리 다른 계획을 짜지 않았으니.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른다. 네, 영화 [스파이더맨]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강한 책임을 기꺼이 질 수 있는 가치관은 심어 주지 않은 채, 손 쉽게 강한 힘에 접근할 수 있는 지름길로만 애들을 내모는 것이 진정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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