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어렵다. 학교 국어책에서 배운 시는 모조리 어려웠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감성이 풍부하지 않은 내게 "아아 임은 갔습니다." 여기서 임은 누구냐고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주눅이 들어 제대로 답변도 하지 못한 때가 떠오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길지도 않은 짧은 문장인데 왜 이렇게 어려운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할 때가 많다. 서점에서 가서도 선뜻 시집을 집어 들 용기는 없다. 김이경 작가의 [시의 문장들]은 시를 모르는 초보자에게 정말 좋은 책이다. 저자가 좋아하는 시의 문구를 뽑아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쉽게 풀어서 이야기해 준다. 무엇보다 저자의 글솜씨가 탁월해 시인의 작품보다 김이경 작가의 문구가 좋은 것도 이 책의 매력이다. 어렵고 난해했던 시를 초보자의 관점에서 풀어서 말해주니 다시 한번 읽어보게 한다. 시에 입문하고 싶은 초보자에게 추천한다. 정말 좋은 시와 그 시를 해석한 저자의 수려한 문장도 즐길 수 있으니까.
돌아보면 기쁠 때는 기쁜 대로 힘들 때는 힘든 대로, 시는 노래가 되고 휘파람이 되고 눈물이 되어 행복한 나를 춤추게 하고 아픈 나를 위로해 주었다. 특히나 사람이 밉고 싫어서 마음이 지옥 같을 때 시가 준 깊은 평화는 잊을 수가 없다.
유시민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외롭고 힘들고 슬플 때 그런 부정적 감정의 무게를 견디려고 책을 읽는다고. 이 책의 저자 김이경도 사람이 밉고 싫어서 마음이 지옥 같을 때, 시는 깊은 평화를 준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이 괴로울 때 책 한 권이나 시 한 편은 크게 위로가 된다고. 나도 그런 면을 책에서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시는 말수가 적다. 너도 나도 목소리를 높이는 세상에서 압축과 생략으로 이루어진 시는 그 자체로 침묵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하지만 처음 만난 사람이 말이 없으면 불편하듯이 시도 그래서 서먹하고 친해지기 힘들다. 수수께끼와 비밀이 많은 시를 이해하려면 궁리를 해야 하는데 그게 성가실 때도 있다. 그런데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처럼 시도 그렇다. 안면을 트고 자주 만나면 친해지고 좋아진다.
수수께끼와 비밀이 많다는 말이 시에 딱 어울리는 말 같다. 읽어도 읽어도 모르겠는 게 시다. 시를 이해할 만큼 감성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정말 시는 수수께끼 천지인 것 같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되는 연인처럼 시도 하나씩 알아가면 좋아질 날이 오리라 믿고 싶다. 시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시의 가장 좋은 점은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여유를 주는 것 같다. 한 템포 쉬어가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생각에 빠질 수 있게 한다는 매력을 조금은 알 듯하다.
천상병 전집 - 시 [내집]
누가 나에게 집을 사주지 않겠는가? 하늘을 우러러 목 터지게 외친다
나의 마음을 어쩜 이리도 자신감 차게 말했을까. 누가 나에게 집을 사주지 않겠는가? 나는 시인처럼 외칠 자신이 없다. 그래도 한 번 외쳐보자! 혹시 누가 알아. 집을 사줄 선장이라도 나타날지...
잘잘루딘 [나는 있습니다, 그리고 없습니다 - 모든 것을 사랑에 걸어라
아직 세우지 않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김소연 - 수학자의 꿈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어떤 말로 위로를 해줘야 할지 모른다면, 그저 가만히 들어주기만 해라.
최승자 [삼십 세] - 이 시대의 사랑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벌써 세상살이가 죽을 만큼 힘들다. 세상살이가 힘든 건 나이와는 상관없다. 누군가는 스물에, 마흔에, 쉰 살이 됐을 때 그런 감정을 느끼기도 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 살면서 한 번쯤은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상황에 부닥친다면 나는 어떨까?
달빛에 퍼득이는 수면은 재빠르게 페이지를 넘긴다
여기 달 귀퉁이는 언제나 접혀 있다
윤의섭 [세상에 없는 책] -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석촌호수를 걷다가 햇볕 쨍쨍한 날 후수 수면위로 작은 파도가 무수히 사라졌다 일어나고를 반복했다. 작은 파도를 봤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아쉬웠던 그 날. 이 시를 알았더라면. 달빛에 퍼득이는 수면은 재빠르게 '페이지'를 넘긴다고. 역시 시인은 다르다.
오은 [1년] -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1월, 올해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오은 작가의 '1년' 중 나는 다시 1월의 문구가 제일 마음에 든다. 뭐든지 잘될 것만 같다는 자기 최면이라도 걸려보고 싶은 한 구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는 6월을 노래한 문구다. 1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독자에게 골라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을 주는 시다. 이렇게도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이선영 [딸] - 작가세계
네가 왈칵 꽃필 때마다 내 가지는
소스라치게 당겨진 손목이 된다
딸내미가 자라서 점점 이뻐지고 짧은 치마에 살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면 걱정하지 않을 엄마 아빠가 있을까? 나날이 화사하게 꽃피는 딸의 자라는 모습을 보며 나쁜 놈에게 해코지나 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엄마의 마음. 끊어질 듯이 팽팽하게 당겨진 나뭇가지는 매 순간 딸을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을 딸은 알아줄까.
슬픔은 슬픔이 알고 슬픔은 슬픔에 힘이 됩니다. 지극한 슬픔은 지극한 힘입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한일 회담 반대 성명에 이름을 올려 고문당한 작가는 미국으로 쫓기듯 떠난다. 홀로 외롭게 지내던 그에게 동생이 찾아와 큰 힘이 되지만, 강도의 총에 맞아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슬픔에 방황하던 시인은 홀로 산에 들어가 시를 쓰며 슬픔을 달랬다. 지극한 슬픔은 지극한 힘이라는 말. 슬픔이 오히려 힘이 되어 살아갈 희망이 생긴다는 의미. 몇 번이고 곱씹어 생각하게 한다.
시바타 도요 [저금] - 약해지지마
난 말이지, 사람들이
친절을 베풀면
마음에 저금을 해둬
아흔여덟에 자신의 장례비를 털어 시집을 출간한 할머니. 이 시집은 160만 부나 팔렸다. "인생이란 언제라도 지금부터야. 누구에게나 아침은 반드시 찾아 온다"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나이 90에도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매사에 늦었다고 핑계만 대는 나 같은 사람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 거기다 할머니의 시구는 더 대단하다. 타인에게 받은 친절은 마음을 저금하는 할머니. 남이 나에게 베푼 친절보다 안 좋은 일로 상처를 줬을 때 더 마음에 담아둔다. 좋은 건 금세 잊어버리고 나쁜 것만 기억하는 무리에게 새겨들어야 할 할머니의 유언, 가르침이다.
김남주 [자유] - 나의 칼 나의 피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나로 말하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 깊은 생각 하며 살지 않았다. 항상 막연함만이 있었다. 무언가 되겠지 하는 마음. 그런데 이런 자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더 아리송하게 한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다.
이윤설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네모난 작은 새장이어서
나는 앞발로 툭툭 쳐보며 굴려보며
베란다 철창에 쪼그려앉아 햇빛을 쪼이는데
저자는 말한다. "마음이 지옥 같을 때 그 속으로 속으로 들어가려고만 했지 지옥을 꺼내 볼 생각은 못 했어."라고. 속상한 일이 생기고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그걸 숨기기 바쁘다. 드러내놓고 치유하려고 하지 않고 담아두고 담아두다 마음은 썩어버린다. 그렇게 썩은 채로 살고 있다. 나는... 한 번쯤은 마음의 지옥도 꺼내어서 발로 툭툭 쳐보는 것도 좋다는 것.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 게 눈속의 꽃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누군가를 기다려 본 사람은 알 거라는.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 처음 사랑을 시작한 모든 사람에게 이런 광경은 한 번쯤 있지 않을까. 카페에서 기다리는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문이 열릴 때마다 그 문에 눈길이 가는 게 사랑의 시작.
라이너 쿤체 [당부, 그대 발치에]
나보다 일찍 죽어요, 조금만
일찍
당신이
집으로 오는 길을
혼자 와야 하지 않도록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고 살아 보니 이 시구가 쉽게 가슴속으로 들어온다. 나보다 조금만 일찍 죽으라는, 그래서 혼자 집으로 오는 길이 쓸쓸하지 않도록.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나 혼자 남게 된다면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살아보면 안다.
송진권 [새 그리는 방법]
시란 이런 재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다. 이렇게도 시가 된다는 것. 정말 기발한 시라 생각한다. 새 한 마리 그리는 것도 시가 될 수 있다는 것.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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