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24 / 별것 아닌 대화가 필요해
같이 살아도 늘 대화할 시간이 없고, 따로 살 때는 그 이유로 얼굴도 자주 못 보고, 그러는 사이에 각자 안에 쌓여가는 이야기들은 점점 옛일이 되고, 결국 말하면 또 뭐하나 싶은 사소한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사소한 이야기가 주는 힘을 포로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쓸쓸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사소한 이야기라도 주고받지 않으면 삶은 점점 더 쓸쓸해지고 말 거라는 거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보노보노는 아빠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대화를 나누면서 생각한다. '재미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도 꽤 괜찮은걸.'
나도 이러면서 산다. 머리에 피가 말라갈 무렵부터 엄마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해본 적 없이 살았다. 아니 한 번이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대화를 해보지 못했다. 굳이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고 말을 하지 않더라도 크게 불편함 없이 살았으니까.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가 우리 집안의 큰 골칫거리여서 여유로운 대화를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사소하고 재미없는 대화조차도 하지 않는 시간은 지금까지 쭉 이어졌다. 그냥 이렇게 살고 있다. 오랜 시간 각자 안에 쌓인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할까? 아니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밥 먹었어?"라고 전화 한 통 집어넣는 것이 좋을까?
페이지 31 / 친구가 되는 방법
사람 사귀는 데 기술이 어디 있겠냐고 해도 분명 있는 것 같다. '진심은 통하게 돼 있다'는 상식도 때로는 배신당하기 일쑤고, 아부인 걸 뻔히 알면서도 칭찬하는 말에는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과 친해지고, 어딜 가나 사랑받는 사람을 볼 때마다 때로는 부럽고 배 아프기도 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는 관계를 시작하는 일에 대해 고민할 뿐, 관계를 유지하는 일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관계에 있어 진짜 중요한 것은 시작이 아니라 유지인 것을.
정말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에 시작보다 더 중요한 게 그것을 유지하는 것인데. 나는 관계를 유지하는 기술이 거의 0점에 가깝다. 타인과 관계를 시작하는 일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내 머릿속은 복잡하다. 어떻게 해야 그 사람과 계속 좋은 인연으로 같이 갈 수 있을까? 늘 고민하지만, 참 해답을 찾기 어렵다. 이렇게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관계 유지를 위해서는 큰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다. 시작했을 때만큼의 에너지를 쏟지 않는 나의 문제. 좋은 관계를 향해 급속도로 가까워지기만을 바라는 마음에 서두르게 된다. 상대방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그러다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를 느끼면 나는 즉시 급브레이크 밟아 정지하고 만다. 속도를 줄여나가면서 천천히 천천히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가 단시간에 좋아질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관계 유지에 대한 지구력을 키울 노력은 하지 않고 금세 그 의지가 식어버린다. 관계의 시작에서 상대방에게 아무리 좋은 첫인상을 주었어도 유지하는 기술이 떨어져 길게 가지 못하고 멈추어버린다. 유지하는 기술이 단순히 지식 습득만 하는 거라면 열심히 공부해서 좋아질 수 있다지만, 사람과의 인연이 어디 공부한다고 될 문제인가. 나의 태도 때문에 상대방이 편안하지 못하면 어쩌나, 만나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하는데 내게는 그럴 능력이 부족하다. 편하지 않은 사람과 만날 사람은 없으니까. 항상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되는데. 그래서 더 마음 졸이고 불안한 마음이 든다. 내 모습 그대로 보여주면 되는 것인데 매번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내가 내가 아닌 양 그래서 관계 유지를 못 하는 것인지도.
페이지 63 / 싫어하는 것과 사이좋게 지내기
하지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잘 살펴보면 그 안에 내 모습이 있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은 결국 나와 닮은 사람이다. 가만있어보자.... 그렇다면 너부리와 나는? 어휴, 닮았네 닮았어. 폭력적인 성향만 빼면 빼도 박도 못하겠다. 다만 나는 겁이 많아서 주먹을 쓸 줄 모를 뿐이다. 내가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을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보인다. 평소 나를 유난히 흥분하게 하는 사람에 대해 떠올려보면 그 사람의 싫은 점이 나와 너무 닮아서 싫은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잘 살펴보면 그 안에 내 모습이 있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은 결국 나와 닮은 사람이다.' 이 말을 듣고 곰곰이 그를 생각해 본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그리고 나를 싫어하는 그. 정말 그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 나는 정말 그 인간이 싫은데.... 그런 인간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무언가 힘든 일이 있어 말을 꺼내면 자신이 더 힘들다고 인상을 쓴다. 내가 더 힘드니 말조차 꺼내지 말라는 얘기다. 자신의 상황은 더 힘드니 괜한 말을 꺼내서 열 받게 하지 말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매번 나온다. 정말 정나미 떨어지는 말투가 날아온다. 상대방을 무시하는 그의 태도. 그의 그런 모습이 나와 닮았다고?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 가지는 분명히 닮은 것 같다. 그런 말을 내뱉는 그의 모습에서 왠지 고독이 느껴진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극도로 쳐내는 그의 모습이 정말 나를 보는 것 같다. 나 또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극도로 쳐내거나 미워해 내 주위에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고독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 면에서 그와 나의 닮은 모습이 있어 다행인지는 모르겠다.
페이지 71 / 졌다고 생각한 놈이 있을 뿐
싸움이 겁나서 말을 아끼게 되는 사람에게는 결국 마음도 아끼게 되니까. 서로를 이해하기만 하는 관계란 서로 이해할 만큼의 애정만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여러모로 겁쟁이다. 부부 사이에 싸움 한 번 하지 않은 부부가 있을까. 살아온 길이 다르니 생각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결혼 초기엔 그걸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더 많은 싸움이 벌이지는 시기가 신혼이다. 더 깨가 쏟아지고 행복할 거라고 예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 부부 관계다. 깡패나 조폭 빼고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나도 깡패가 아니니 싸움을 좋아할 턱은 없으니 사랑하는 사람과 싸우고 싶겠는가. 그런데 한 번 싸움이 시작되면 내가 쓸데없는 얘기까지 꺼내 더 큰 싸움으로 번질 두려움에 말을 아끼고 하지 않았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이건 큰 오산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게 됐다. 말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싸움은 더 커진다는 사실을. 큰 싸움으로 번질 것이 겁나서 말을 아끼게 되면 마음속의 진심도 같이 묻어두는 결과가 된다. 싸우면서 돈독해지는 부부가 더 끈끈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말은 아껴야 할 곳은 아끼되 아끼지 말아야 할 곳도 있다는 것.
페이지 119 / 재미없어지고 나서야 할 수 있는 일
인간의 노동력을 환산한 값이 월급이라고 하지만 과연 월급에 노동력만 들어 있을까. 마음에 안 드는 후배도 참고 넘기는 인내심, 상사의 썰렁한 유머에도 웃어주는 서비스 정신, 할 줄 아는 게 없어도 할 줄 아는 게 많아도 욕을 먹을 수 있다는 깨달음, 나만 회사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회사도 나를 싫어하고 있었다는 반전.... 이 모든 것 한 달치 분량을 꾹꾹 눌러 담은 게 월급 아닌가. 특히 그 안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 지구력이라는 사실은 쓰라리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이다. 빈약한 통장 잔고를 마주하니 청소고 뭐고 다 귀찮아져서 그대로 벌렁 누워버렸다. 그런데 대충 손을 더듬어 잡은 책에는 왜 하필 이런 문장이 써 있는 걸까.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때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때, 우주는 우리를 돕는다.(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중에서. 마음의 숲 출간)"
너부리 아빠는 말한다. "재미없어지고 나서야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어른"이라고. 맞다. 아이들은 재미없어지면 금세 그만둔다. 나도 살면서 어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하기 어려웠다. 만약에 아이들에게 어른은 뭐예요?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분명히 망설일 거 같다. 이미 외견상으로는 어른이 되어버렸는데 어른이 무엇인지 잘 설명할 자신이 없는 어른이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 직장을 다니며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없는 것이 사회라는 냉혹한 현실이다. 아무리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자신의 적성에 딱 맞는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이 길어지면 피로감을 느낀다. 어느 시점에 오면 그 일도 재미가 사라진다.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은 입사 후 그 일을 배워나가는 기간만 유효했던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이 재미없어지는 이유는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다. 동료들과의 인간관계가 편치 않아 일의 흥미를 잃을 수도 있고,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돌아오지 않을 때 일 수도 있고,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을 맡아 잘 처리하지 못해서 일 수도 있다. 일차원적 이유가 아니라 다차원적인 원인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우리 모두는 재미없어도 묵묵히 자기 일을 계속해나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른이라서.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나 충분히 어른으로서 제 몫을 다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 같다. 이제는 정확히 답변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어른이 뭐예요?"라는 아이들의 질문에. 재미없는 일이라도 계속할 수 있는 사람.
페이지 250 / 더하기 빼기 관계
하지만 요새는 다른 생각이 든다. 존재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관계보다 실질적인 안심을 전해주는 관계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 힘들어"라고 말할 때 가만히 안아주는 사람보다 뭐가 힘든지 물어보고 해결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배고프다고 말할 때 나도 배고프다고 공감해주는 사람보다 먹고 싶은 걸 가져다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초능력을 가진 사람 말고 내 말을 오해 없이 받아들이는 이해력을 지닌 사람이 더 절실하다.
내가 힘들 때 나에게 누군가가 실질적인 도움을 전해줬던 기억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들의 탓이 아니었다. 내가 힘들다고 말을 하지 않았었기에 내가 힘든지 몰랐으니까. 살면서 "나 힘들어"라는 말은 내 안에서 수도 없이 일어난다.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을까. 단지 입 밖으로 표현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 같다. "나 힘들어"라는 말을 받아 줄 상대를 인생에서 단 한 명이라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다. 실질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공감은 얻어 낼 수 있는 그 누군가가.....
불변의 진리인 것 같다. "무언가를 하면 반드시 무언가가 벌어진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왜 빨리 깨닫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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