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가히 메시지의 바다. 어부가 황금어장을 찾듯 나는 간판의 숲을 어장(語場)으로 여기니 바로 상상어장이다. 상상어장에선 오늘(내일)도 말의 꽃이 달뜨게 피어난(날 것이)다. 그 꽃을 볼 때마다 나는 어부(語夫)가 된다. 글꽃 말꽃과 노니는 어부에겐 얽매일 일이 없더라. 자유롭더라. 글을 쓰는 내내 그 자유를 스스로 물었다. 평화도 함께. - 낚는 글 중에서
우연히 들른 어느 동네의 도서관. 나는 미리 생각해 둔 책을 꼭 집어서 읽지 않는다. 열람실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신간 코너로 간다. 최근에 나온 책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하다. 새로운 걸 좋아하는 습성 때문일까. 새로 나온 따끈따끈한 책에 손이 가고 눈길이 쏠린다. 옷을 사러 상점에 가도 많이 생각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거 하나 쑥 뽑아 들어 계산대로 간다. 이렇듯 도서관에서도 옷 파는 상점과 비슷한 행동이 일어난다. 그렇게 쑥 뽑아 든 책 한 권.
[상상어장] - 이일훈. 먼저 제목이 내 눈길을 끌어당겼다. 책장을 넘기기 전에 책 커버 뒤쪽 문구를 먼저 살핀다. 이 책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첫 구절 '세상은 가히 메시지의 바다'라는 문구를 만났다. 벌써 첫 구절부터 생각하게 한다. 세상은 메시지의 바다인데 그걸 제대로 캐치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누군가에겐 그저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쓰레기 같은 글귀들. 어느 동네나 넘치게 걸려 있는 간판의 문구가 그의 황금어장인 것이다. 간판의 숲을 어장(語場)으로 여긴다는 작가 이일훈. 어릴 때 아마도 일곱 살 쯤이었다. 엄마와 버스를 타고 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간판의 글자를 죄다 읽고 즐겼던 때가 떠올랐다. 나는 그때 왜 간판의 글자를 읽었을까. 간판의 문구가 재미있어서 그랬을까? 그저 말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호기심이 가득한 아이의 눈에 간판의 글자는 말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이 작가는 이런 흐드러진 간판이나 담벼락에 휘갈겨 쓴 문구 하나 놓치지 않고 자신의 황금어장으로 만든다. 어부가 생선으로 자신의 배를 만선으로 채워 기쁨을 누리 듯이 작가는 간판의 쓰인 글 한 자 한자 허투루 보지 않고 그 글들과 노니며 자유를 낚는다.
이런 책을 만나면 너무 기분이 좋다. 우연히 빼든 책에서 낄낄거리기도 하고 노트에 적지 않고선 못 배기는 글을 만날 때. 만선을 달성한 선장의 마음은 아니어도 높은 파도 치는 바다에서 힘겹게 생선 하나 건져 올린 듯 기쁘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작가의 살아있는 글솜씨에 탄복하게 된다. 이 글을 쓰려고 국어사전을 얼마나 뒤져봤을까 상상이 된다.
상상어장에선 오늘(내일)도 말의 꽃이 달뜨게 피어난(날 것이)다. 어릴 때 간판으로 말 공부를 했듯이 이제는 그곳에서 나도 상상어장을 만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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