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채식주의자 [한강]

책소개/소설

by gyaree 2017. 8. 31. 17:22

본문

반응형

2017.8.31

채식주의자






"입술이 그게 뭐야. 화장을 안한 거야?"

나는 구두를 벗었다. 검은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우두망찰 서 있는 아내의 팔을 끌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설 참이야, 지금?"

나와 아내의 모습이 화장대 거울 속에 비쳤다.

"다시 해, 화장."

아내는 조용히 내 손을 뿌리쳤다. 콤팩드를 열고 퍼프를 얼굴에 두드렸다.


우두망찰 

정신이 얼떨떨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양. (비슷한 말 : 우두망절)

외삼촌댁이 버럭 역정을 냈다.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영문을 몰라 배서방댁은 한층 우두망찰을 했지만 태임이는 그게 자신에 대한 간접적인 함구령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박완서 [미망] 상편 중.

관속들은 하릴없이 맥 풀린 다리로 우두망찰 서 있었다. 현기영 [변방에 우짖는 새] 중.

부엌간에 오그르르 뭉쳐 앉은 사람들은 우두망찰 정신들이 반나마 나가 있었다. 최명희 [혼불] 중.  

우리가 살면서 '우두망찰'이라는 단어를 한 번이라도 사용하는 날이 있을까? 생활 속 사용하는 단어들은 항상 한정되어 있다. 부부간의 대화, 아이들과의 대화, 회사 동료와의 대화 등등. 일반적인 대화에서는 상대방이 모르는 단어로 이야기를 하면 왠지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마련이다. 

알쓸신잡 프로그램에서 사물의 이름을 정확히 아는 자가 '작가'라고 작가 김영하는 말했다. 맞다! 우리는 들판에 핀 꽃을 보고도 저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그냥 노란색 꽃이라고만 한다. 굳이 사전을 뒤져가며 그 노란색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말이 생기고 문자가 만들어진 이래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붙어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름을 지어주었을지는 모른다. 보통 사람들은 모든 사물의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을 뿐이지, 그 사물에 애초부터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상황과 타이밍에서 사용하는 정확한 단어가 주는 힘은 무언가 2차 적인 행동을 유발한다. 

'검은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우두망찰 서 있는 아내의 팔을 끌고 안방으로 들어갔다.'라는 문장에 사용한 '우두망찰'이라는 아주 생소한 단어를 보는 순간 사전을 펼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머릿속에 박혀 떠나질 않는다. 작가가 잘난 체하고 싶어 저런 고습스러운 단어를 사용했을까 하는 의구심도 약간은 들었다. 그런데 사전의 정확한 뜻을 알고서야 저 문장에 쓸 수밖에 없는 단어라는 것을 알았다. 작가 김영하가 말한 '사물의 이름을 정확히 아는 자'가 작가라는 말이 다시 한번 가슴속에 깊이 새겨진다. 

하지만, 일상 대화에서 '우두망찰'을 말했다간 "너 뭐야!?"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는 것.



염오감  : 마음으로부터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

그때마다 나를 사로잡는 것은 기이하고도 불길한 예감이었다. 예감이라는 것을 갖고 살아본 적 없는 둔감한 성격의 나였지만, 그 안방의 어둠과 정적은 오싹했다. 다음날 아침 식탁에 앉은 아내의 단단히 다문 입술, 어떤 말도 귀담아듣지 않는 옆얼굴을 나는 염오감을 감추지 못한 채 건너다보았다.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풍파에 깎인 것 같은 그 표정이 나는 꺼림칙하고 싫었다. 

병적으로 싫어하는 감정이 '혐오감'이라면, 자신의 아내인 영혜에게 느끼는 '염오감'은 이미 부부로서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볼 수 있다. 마음으로부터 싫어하고 미워하던 아내의 채식으로 이어진 자살 소동은 오롯이 그에게는 반갑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에게는 이혼을 정당화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채식으로 이상하게 변해버린 영혜대한 감정이 '염오감'이었을까? 아니면, 매력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은 채 결혼한 그때가 염오감의 시작이었을까? 그냥 집에서 밥해주고 빨래해주는 가사 도우미가 필요했을 뿐. 아내를 대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다. 처음엔 별 관심 없이 결혼했다고 하더라도 살다 보면 정이 붙기 마련인데.



더이상의 군말없이 통화는 끝났다. 아이를 통해 열결된, 군더더기없는, 일종의 동업자의 관계가 이즈음 아내와 그의 관계였다.

부부 : 아이를 통해 연결된, 군더더기없는, 일종의 동업자의 관계. 

아이를 통해 연결돼 쇼윈도 부부로 살아가는 부부는 우리 주위에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처음에야 사랑으로 결혼하지만,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각자 노는 부부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평생을 놀고먹고 살아온 나의 아버지가 어머니 입장에선 아이를 통해 연결된 부부였고, 부부의 성격이 극명하게 달라 주말이면 남편은 홀로 놀러 나가고 남겨진 딸을 데리고 이리저리 체험 견학을 다니는 동네 부부가 그렇다. 살면서 아이를 통해 연결된 부부들을 볼 때마다 안쓰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물론 부러운 부분은 남편 혼자만의 자유 시간이 있다는 것. 하지만 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업자가 되는 것이 아닌, 서로를 배려하는 끈끈한 부부 관계가 우선해야 한다. 자식 때문에 몇십 년을 쇼윈도 부부로 산다는 건 어느 쪽이건 행복하지 않으니까.    



그녀가 빈 잔을 들고 일어섰으므로 그도 따라 일어섰다. 그녀가 내민 잔을 받아 탁자에 올려놓았다. 캠코더의 테이프를 갈아끼우고 삼각대의 위치를 재조정했다.

"다시 시작해볼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사이 햇빛이 다소 사위어, 그는 텅스텐 조명 하나를 그녀의 발치에 설치했다.



사위어 : 불이 사그라져서 재가 되다.


파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그는 아내에게 전화했다.

"어디예요?"

냉담하기보다는 착잡한 목소리로 아내가 물었다.

"집이야."

"일은 잘됐어요?"

"아직. 내일 밤까진 바쁠 것 같아."

"그래요. .... 그럼 쉬어요."

전화가 끊겼다. 차라리 아내가 다른 아내들처럼 소리치고 화를 낸다면, 잔소리를 하고 악담을 퍼붓는다면 마음이 편할 것이다. 이토록 쉽게 체념하고, 그 체념의 앙금이 우울함으로 가라앉는 아내의 성격이 그를 숨막히게 했다.

영혜의 언니인 인혜도 평탄한 부부 관계는 아니다. 남편이 무언가 잘못을 저질러도 크게 동요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참고 인내하는 것만이 유일한 행동. 그렇다고 남편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도 없어 보인다. 동업자 관계로 지속한 부부 생활. 화를 내지 않고 참고 인내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숨막힘을 토로하는 남편. 삶에 지쳐 지지고 볶고 목소리 높여 싸우는 것이 일반적인 행복한 부부 관계라 생각한다. 이 소설 속의 두 커플 영혜, 인혜 부부는 그냥 동업자다. 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에서 정상적인 인간이 되려고 '시라하'라는 사회 부적응자를 남편 역할로 내세운다. 이 두 부부도 겉으로는 정상적인 여느 부부와 다름없이 보이지만, 이미 둘의 관계는 타인이 생각하는 평범한 부부가 아니다. 정신이 나간 처제에게서 성적 욕구를 느끼는 형부. 예술 작업이라는 핑계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게 된다. 이 모든 행동의 원인은 자신의 아내의 무조건적인 체념과 인내로 돌린다. 그러면서 자신의 죄책감을 조금은 덜어보고자 한다.  



그러나 애써 기울인 여러 배려들에도 불구하고, 결혼 후에도 그는 여전히 지쳐 보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일로 바빴고, 어쩌다 집에 머물러 있는 시간에는 마치 여관에 든 여행자처럼 서름서름해 보였다. 특히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그의 침묵은 고무처럼 질기고, 바위처럼 무거웠다.

서름서름 : 사이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매우 서먹서먹하다. 

인혜가 느끼는 남편에 대한 감정이 이 단어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서름서름' 남편 마음 속에 있는 '인혜', 인혜 마음 속에 있는 '그'의 존재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매우 서먹서먹한 관계. 살면서 서름서름해지는 것일까? 처음부터 서름서름했을까? 


  

..... 미친 거니, 너 정말 미친 거야.

지난 수년 동안 자신이 결코 믿을 수 없었던 그 질문을, 그녀는 처음으로 영혜에게 던진다.

..... 네가 정말 미친 거니.

영혜가 이미 미쳤다는 걸 알고 있던 인혜,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 사랑하는 가족 중 한 명이 정신병원에 있다면..... 그 속에서 미친 듯이 광기를 내비쳐도 미쳤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미친 것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인정할 수 없는 마음. 그냥 아플 뿐이라고. 그런데 마음속 깊은 곳엔 이미 '미쳤어'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을 것이다.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추어진 단어. "네가 정말 미친 거니." 제발 제정신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역설적인 대사가 아닐까.




더 이상의 치료가 힘들어지자 정신병원에서 영혜를 데리고 나오는 그녀. 

..... 어쩌면 꿈인지 몰라.

라고 영혜에게 속삭인다. 영혜에게도 그녀에게도 이 현실이 꿈이길 바라는 마음. 어떤 악몽도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동생에게 속삭인다. 미쳐버려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는 동생의 인생, 그 동생을 바라보는 그녀. 영혜와 인혜 누구의 인생이 더 힘들고 가혹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이상한 꿈을 꾼 이후로 채식을 하게 되었고, 채식으로 인해 모든 사람과 멀어지고 끝내는 정신병자의 길로 들어섰던 영혜. 그렇게 병에 걸린 동생과 그녀의 남편이 행한 예술 행위로서 그려지는 섹스. 남편과 동생의 그런 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본 그녀. 결국, 애정과 사랑은 이미 사라지고 오로지 아이로 연결된 동업자 관계인 남편과도 이혼을 하고 영혜를 돌보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아마도 그녀가 아닐는지.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라는 그녀에게 '그렇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우리 시대 웹툰작가들의 생존기 - STYING ALIVE
국내도서
저자 : 박인찬
출판 : 다할미디어 2017.04.25
상세보기
나도 웹툰 작가가 될 수 있다
국내도서
저자 : 박인찬,박세기
출판 : 혜지원 2016.05.07
상세보기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