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
이 첫 문장에서 나는 이미 이 책에 푹 빠질 준비가 되었다. 만화에서 주인공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 있듯이 내 머리 위로 말풍선이 퐁퐁 튀어나온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뭐지?" 이리저리 뇌를 풀가동하여 상상을 해본다.
아빠가 댐 관리 팀장으로 발령받아 주인공의 가족이 새로 거처를 옮긴 곳은 세령 댐을 관리하는 사택이 있는 S 시. 이곳에 온 지 2주 만에 사건이 발생한다. 아빠는 희대의 미치광이 살인마가 되어 체포되고 엄마의 죽음도 이유를 모른 채 아저씨와 주인공 서원은 경찰차에 실린다. 그의 나이 열두 살 때 일이다. 그 뒤로 아저씨와 헤어지고 서원은 작은아버지에게 위탁되지만, 그곳에서도 이미 살인자의 아들이라 알려지고 같이 살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서원은 친척들의 집에 돌아가며 맡겨지지만, 그들에게 버림받는다. 그나마 서원을 위탁받은 이유는 그에게 남긴 유산을 나눠 가졌기에 할 수 없이 받아들였다. 갈 곳이 없었던 서원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은 아저씨가 주고 간 휴대폰. 그 번호로 걸어봐야 받을 사람이 없어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일말의 기대를 품고 공중전화 박스에서 버튼을 누른다. 예전 번호를 바꾸지 않고 사용하기를 기대하며. 다행히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서원이를 받아주었다. 다른 친척들처럼 며칠 돌보다 또 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해 겨울이 가기 전 그의 법적 후견인이 되었다. 그런 아저씨의 고마움에 보답하고자 열심히 공부해 중학교 전체에서 5등의 성적을 올리는 행복한 시간이 이어졌다. 희망이라는 것을 가져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아버지의 사형 확정판결이 난 다음 날 우편물이 한 통 날아든다. 살인사건이 벌어진 날 찍혔던 서원의 얼굴 사진이 잡지 1면 전체를 장식한 채 실려있다. '세령호의 재앙'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모자이크 처리도 되지 않은 아버지의 사진도 같이. 이 잡지는 서원의 학교에 퍼지고 그를 괴롭히던 아이에겐 아주 좋은 놀림감이 된다. 결국 싸움이 벌어지고 서원은 억울하게 소년원으로 가게 될 처지에 놓인다. 다행히 아저씨의 읍소와 전세 원룸을 뺀 합의금으로 소년원행은 막을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선데이매거진의 공격은 멈추질 않아 안정된 생활은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세상에 버려져 아저씨와 오게 된 곳은 인구 12명의 바닷가 민박집.
이야기 초반 열두 살 어린이 서원이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세상으로부터 내쳐지는 극한적인 상황 전개에 눈을 뗄 수 없게 몰입하게 한다. 이 사회에 만연된 미디어의 폭력이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내는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초반의 설정은 숨이 차오른다. 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가 분노할 수조차도 없게 만드는 사회의 안쓰러운 모습을 서원이가 대처하는 방법으로 보여준다. 살다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면 당황하고, 분노하고, 수치심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거늘. 어린 서원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 아닌 친척들에게서 버림받은 영향이 더 크다 할 수 있다.
7년의 밤은 전반적으로 우울한 이야기다. 먼저 열두 살의 나이에 홀로 세상에 남겨진 서원이 마주하는 세상은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만 하는 세상이다. 희대의 살인마 아버지를 둔 초등학생 어린이겐 너무나도 가혹한 세상이 기다린다. 서원의 가족은 우리 시대에 정말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야구밖에 할 줄 모르는 아빠는 프로야구단에서 방출돼 댐 경비로 오게 되고, 인생 자체가 험난했던 삶을 살아온 엄마는 억척녀라 말할 수 있다. 어떻게든 중산증의 문턱이라도 밟으려는 의지 하나로 힘겹게 아파트를 장만한다. 그나마 그녀의 인생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외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는데.... 남편 최현수에게 일이 벌어진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최현수의 인생에도 실수가 찾아왔는데 그 실수가 어린 여자 아이의 살인에까지 이르게 된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보통 사람에겐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평생을 살인이라는 글자를 곁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조폭이나 깡패 혹은 연쇄 살인범 정도이지 않을까. 그 외의 사람들에겐 살인이라는 단어는 남의 얘기나 다름없다. 최현수는 어두운 밤 음주, 무면허 상태에서 오영제의 딸 세령을 차로 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세령의 숨은 붙어 있었다. 순간 이 사고로 자신이 잃어야 할 것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힘겹게 쌓아온 탑이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 잘못된 판단을 한다. 결국 살아있던 세령의 목을 졸라 살인을 저지른다. 그런데 사고가 나기 전 이미 세령은 아빠에게 죽을 만큼 가혹한 학대를 받아 도망가는 중이었다. 오영제라는 인물은 겉으로 보기엔 상류층에 속하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이다. 그의 가혹한 가정 폭력은 딸을 남겨두고 아내 하영이 도망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최현수의 차사고로 죽지 않았어도 자신의 폭력과 학대로 딸 세령은 죽임을 당할 처지였다. 독자는 여기서 생각하게 된다. 세령을 직접적으로 죽인 최현수가 나쁜 것인가. 아니면 근원적 원인이 있는 아빠 오제영이 나쁜 것인가.
이 이야기에서 가장 가여운 인물은 최현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결코 살인자를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잘못된 판단과 실수가 한 인간을 어떻게 망쳐 나가는지 여지없이 보여준다. 소설 전체에 각각의 인물들이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작가의 치밀한 구성에 독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세령의 살인으로 시작한 사건은 잘못된 인생을 사는 오제영의 사이코 같은 기질과 맞물려 그릇된 복수로 이어진다. 자신의 딸의 죽음은 슬퍼하지도 않으면서 그에 대한 복수로 살인을 저지르는 인간 오영제. 최현수의 아내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아들 서원까지 최현수가 사형되던 날 같이 죽이려는 파렴치한 정신병자다. 오히려 가해자는 오영제이고 피해자는 최현수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한순간의 실수로 파멸의 질주를 멈출 수 없었던 한 사내의 이야기이자, 누구에게나 있는 자기만의 지옥에 관한 이야기며, 물러설 곳 없는 벼랑 끝에서 자신의 생을 걸어 지켜낸 '무엇'. 그것은 최현수의 아들 서원이다. 자신은 불행하지만 아들만은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느 아버지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페이지 28
나는 카메라플래시를 받으며 서 있었던 열두 살 이래로 허둥댄 적이 없다. 소년분류심사원에 다녀온 후부턴 분노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호감을 표해와도 관계에 대한 기대를 품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다. 안다. 놀라면 허둥대야 정상이다. 모욕당하면 분노하는 게 건강한 반응이다. 호감을 받으면 돌려주는 게 인간적 도리다. 내 또래 아이들은 대부분 그렇게 산다. 아저씨는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문장에서 '그렇게'를 떼어내라고 대꾸한다. 나도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당황하고, 분노하고, 수치심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곁을 내줘서는 안 된다. 거지처럼 문간에 서서, 몇 시간씩 기다려서라도 일한 대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사는 나의 힘이다. 아니, 자살하지 않는 비결이다.
친척들에게서도 내쳐지고 그가 찾아갈 곳은 유일한 한 사람. 아버지의 살인이 벌어진 날 같이 있었던 아저씨. 아저씨는 그를 받아들인다. 그런 아저씨에게도 버려질까 두려워 공부를 열심히 해 반에서 1등. 자신이 목표한 것에 8부 능선까지 왔다. 하지만 살인자의 아들이라고 잡지 표지를 꽉 채운 주인공의 클로즈업 얼굴 사진. 하물며 모자이크 처리도 하지 않은 상태. 그 잡지 한 권으로 주인공은 다니던 학교, 아르바이트 편의점에서 쫓겨난다. 썩은 동아줄처럼 언제 끊어질지 몰라 불안하게만 살았던 세상과의 연결고리는 끊어지고 만다. 남들처럼 그냥 평범하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아저씨의 말에서 '그렇게'를 떼어내야 한다는 주인공.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일념. 열두 살에 살인범의 아들이라는 표적을 달고 세상에 홀로 남은 주인공에겐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기가 힘겹다. 괴물로 취급하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내치고 내쳐져 아저씨를 따라 자신의 과거를 모르는 곳까지 오게 된다. '그렇게' 살 수 없다는 한마디는 죽지 않고 살아내야 한다는 어리지만 마음은 강하고 단단한 주인공의 심리를 보여주는 절묘한 문장이다.
페이지 131 / 세령호 1
은주의 엄마 지니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은주의 내면에 있는 엄마의 존재가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지니네 왕대포'의 여주인 지니는 젓가락장단의 고수. 가슴골로 손이 들어오든, 돈이 들어오든 사내의 것이라면 사양하지 않는 여자였다. 코를 찡긋거리며 잇몸까지 드러내고 웃어주는 여자. 엉덩이를 뒤로 빼고 오리처럼 둥싯둥싯 걷는 여자. 잊을 만하면 동네여자들과 드잡이를 하던 여자. 은주 엄마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바로 머리 위에 그려지고, 그로 인해 은주가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은주는 현수의 아내이자 서원의 엄마다. 절대 엄마와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았던 은주.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는 자기 삶을 지킬 수 있다."라는 선생님의 말대로 악착같은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그렇게 힘들게 고생해 어렵게 내 집이 된 아파트. 하지만 자신의 아파트에서 행복감을 느끼며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오늘 저녁 몇 시간이 전부다. 이제 내일이면 세입자에게 내주고 남편을 따라 발령지 사택으로 떠나야 한다. 3년만 그곳에서 지내면 새로운 아파트에 돌아와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란 희망 하나만을 가지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새 아파트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고 남편은 살인범이 되고 아들은 숨어 지내는 삶을 살게 되니 말이다. 정말 힘들게 고생고생해서 잘살게 되었는데 병원에서 암 말기 판정을 받은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은주의 상황이 딱 이런 경우이지 않을까 한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악착같이 살았던 삶이 결국에 다시 불행으로 빠지고 마는 인생이라는 것.
페이지 239 / 세령호 2
"속이 깊은 아이예요."
결혼 전 처음 인사를 하러 갔을 때, 시어머니가 남편을 두고 한 말이었다. 옳은 말씀이었다. 어찌나 속이 깊은지 속을 볼 수가 없는 남자였다. 그녀를 들여놓지도, 그녀에게 보여주지도 않는 통제구역들이 있었다. 알려들면 들수록 자물쇠가 튼튼해지는 구역이었다. 외골수에 융통성도 없었다. 유순해 보이면서도 고집이 셌다. 성실해 보이면서도 무책임했다.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자신의 눈을 찌르는 심정으로 결혼생활을 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모든 걸 알기엔 결혼 전 탐색기가 너무 짧았다. 8월에 만나 12월에 결혼했으니 불과 4개월이었다. 그녀의 배 속에는 서원이 들어 있었고.
페이지 242 / 세령호 2
유순함이란 유약함의 다른 이름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스트레스는 겁쟁이의 변명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압박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였다.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피 터지게 싸워 거꾸려뜨려야 마땅했다. 하다못해 침이라도 뱉어줘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사는 법'이었다.
은주가 말하는 남편 최현수는 유순함이라는 가면을 쓴 유약한 남자였다. 성실하지만 무책임한 남자. 야구를 포기한 것도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한 유약함이라 생각한다. 떨어지는 성적으로 인해 스트레스는 쌓이고 쌓여 왼팔은 이유 없이 경직되고 더는 공을 던질 수 없게 된다. 악착같은 삶을 살아온 은주에겐 이 모든 일이 생존을 위협할 만큼 큰 스트레스인 건 분명하지만 참고 견뎌내지 못한 현수의 유약함에 화를 내지 않을 수 없다. 현수를 '태생적 미숙아'라 말하는 은주의 마음이 충분히 공감되면서도 현수라는 인물이 나와 비슷한 구석이 많아 씁쓸한 마음이 든다. 어디 가서 돈 만 원도 빌려오지 못하는 남편. 나 또한 그렇다. 20년이 넘게 오랜 시간 직장생활을 했지만, 남에게 돈 한 푼 빌릴 용기도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압박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라는 것.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피하지 말고 피 터지게 싸워야 한다는 것. 이게 가정을 꾸린 가장이 짊어져야 할 압박감이다. 그런데 나도 직장에서 누군가에게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피 터지게 싸워야 하거늘. 스트레스 주체로부터 피하는 삶의 시간이 늘어만 간다. 이게 내 가족의 생존 문제와 직결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냥 사람들과 싸우기 싫고, 다투기 싫은 유약한 마음의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은주가 말하는 남편 최현수의 모습이 흡사 나를 보는 듯한 찜찜함은 왜일까.
|
|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0) | 2017.12.07 |
---|---|
기린의 날개 [히가시노 게이고] 우리 사회를 보는 듯한 (0) | 2017.11.24 |
당신의 완벽한 1년 [샤를로테 루카스] (0) | 2017.10.25 |
오직 두 사람 [김영하]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그 이후'의 삶 (0) | 2017.10.16 |
예언 [김진명] 아쉬움! (0) | 2017.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