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유리창 안에서 한 아이가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삼한사미'라고 들어봤나요? 삼일은 춥고 사일은 미세먼지라는 말입니다.
겨우내 짜증스럽던 미세먼지가 봄에도 여전히 기승을 부린다. 이제 마스크는 창피하지 않은 필수품쯤으로 여겨지고 있고 미세먼지가 많은 날, 바깥에는 입을 가린 하얀 마스크를 보는 일도 어렵지 않다. 예전에야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 이상한 시선을 느끼곤 했는데, 미세먼지 덕택에 그런 시선은 사라진 듯하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꼭 챙겨보는 날씨. 미세먼지 그래프가 붉은색을 띠면 확 짜증이 밀려온다. 걸어야 하는데 걷지 못하는 사태에 화가 나기도 한다. 마스크를 착용하고서라도 걸으려면 걷기야 하겠지만 꼬박 두 시간 넘는 여정에 입을 가린 채로 견딜 수 있을까. 특히나 나는 미세먼지에 민감하다. 일기예보를 보지 않아도 하늘만 쳐다봐도 그 느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혀에서 느껴지는 꺼끌꺼끌함. 뿌연 하늘과 혀로 느끼는 미세먼지는 굳이 핸드폰 날씨 앱을 켜지 않아도 가늠할 수 있다.
걸을까 말까 망설이다 오늘은 '말까'로 기운다. 걷기 시작한 지 이십여 일. 어느 정도 걷기가 내 몸에 밴 느낌이다. 이제는 걷지 않으면 왠지 죄를 짓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나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스크도 없이 미세먼지를 자신의 폐 속으로 밀어 넣으며 걷는 사람들. 도대체 그들에게는 미세먼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건지. 아니면 강력한 호흡기와 아이언맨의 원자로 심장을 달고 있는 건지 의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도 저들처럼 미세먼지 나부랭이에 밀리지 말고 바깥으로 나가볼까 하지만 괜한 오기는 약값만 더 들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나의 하늘은 마음껏 뛰놀게 해주는 도우미였다.
사람들은 종종 이야기한다. '내가 어렸을 때는 하늘이 아주 깨끗했어. 미세먼지가 어디 있었어? 봄과 가을 하늘은 정말로 파랬지'라고. 나 또한 그런 세대다. 어릴 적 봄과 가을의 파란 하늘을 기억하는 세대. 미세먼지 따위의 단어는 한국어에 없었으므로. 요즘의 미세먼지 낀 하늘을 쳐다보면 그 시절 하늘이 그리워지는 이유다. 그래도 나에게는 그때 그 시절의 좋았던 하늘의 기억이라도 있지만 지금 나의 아이들에게는 이 뿌연 하늘이 어린 시절 하늘이다. 미세먼지 때문에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하얀 마스크가 씌워진 풍경. 휘몰아치는 찝찝한 먼지 자욱한 회색 하늘. "오늘은 외출하실 때 꼭 마스크를 챙기십시오."라고 말하는 기상 캐스터의 말. 아이들이 자라서 먼 훗날 내 나이가 됐을 때,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정말, 그때가 좋았어. 그래도 내가 어렸을 때는 파란 하늘을 볼 수 있기라도 했으니까."
정말 이대로 40년, 50년 세월이 흐른다면 영화에서 보던 세상을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는 마스크가 아니라 개인 방독면을 다이소에 가서 장만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파한 하늘 아래서 마음껏 뛰어놀았던 어린 시절. 따가운 땡볕에 살갗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얼굴 전체에 땀을 삐질삐질 흘려도 마냥 즐거웠다. 왜 그랬을까?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공기 덕택이다. 동네 아이들은 산 너머로 해가 떨어져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저녁밥 먹으라는 엄마의 큰 외침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낮이건 밤이건 바깥은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노는 놀이터였으며 어린 나에게 집은 들어와서 밥 먹고 자는 장소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집은 잠시 머무는 곳, 바깥은 장기 체류와도 같았다. 그로부터 40년 세월이 지난 지금 집은 새로운 의미가 부여됐다. '피난처' 미세먼지로부터 도피하는 장소가 되었다. 모든 창문을 꼭꼭 걸어 잠근다. 바깥의 백해무익한 먼지는 집안으로 들여놓지 않겠다는 의지로. 비도 내리지 않는 어느 날의 오후, 베란다 창문으로 바깥을 내려다보면 그야말로 고요하다. 뛰노는 아이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집으로 도망갔다. 너 나 할 거 없이 미세먼지를 피해서 '피난처'로 찾아든 것이다. 아니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이다. 유리창 안에서 자기가 뛰놀던 바깥을 바라보는 아이.
이 아이들의 봄은, 하늘은, 어떤 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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