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더운 날씨다. 걷기로 했으니까 더워도 참고 견디며 걸어야 한다. 나는 지금 영동 3교 바로 아래를 지나간다. 햇볕을 피해 양재천에서 가장 시원한 길을 걷고 있는데도 등에서 땀이 흐른다. 더운 날씨에는 시원한 그늘도 소용없는 건가. 굳센 마음을 먹고 걷기로 한 양재천. 무더운 날씨가 내 마음을 마구 흔든다. 태양의 끈질긴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 그것도 잠깐. 다시 태양은 유혹하기 시작한다.
"발길을 돌려, 빨리 버스에 타라고! 더운데 뭐하러 걸어. 얼굴도 새까맣게 탔잖아."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은 점점 더 이글거리며 자꾸만 내 발길에 제동을 건다. 주변 공기마저 건식 사우나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뜨끈뜨끈. 지금은 그늘에서 걷고 있어도 머리에서는 나머지 갈 길이 걱정이다. 대치교를 건너 탄천 1교를 건너가는 코스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은 나의 출근길에서 최고 난이도를 자랑한다. 나무 그림자 하나 찾을 수 없는 공간. 그나마 있는 거라곤 가로등 그림자. 이 가냘픈 그림자로는 내 몸을 숨길 수 없다. 땡볕을 온몸으로 광합성 하며 걸어가야 한다. 정말로 이 코스는 내가 걸으며 얻었던 이득을 송두리째 뺏어가는 느낌이 들 정도다. 걷는 이유는 단순하다. 건강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길은 솔직히 그동안 쌓았던 내 걸음의 저축이 어디선가 새 나가는 감정에 빠지게 한다. 차곡차곡 쌓아왔던 걸음 수가 탄천 1교를 넘어가며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상하게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뭔지. 그만큼 이 길은 체력도 정신력도 소모하게 한다. 내심 오늘은 그 길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내 주위를 데우는 공기처럼 뜨겁게 달아오른다. 잠시 피하는 것일 뿐. 걷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인생도 그렇다. 살다가 힘든 일에 부닥치면 피해 가기도 하고 둘러가기도 하는 것이다. 무작정 뚫고 직진할 수는 없지 않은가. 피해 간다고 해서 창피한 일은 아니듯 잠시 땡볕을 피해 땀을 식히고 재충전도 해야 하지 않을까.
정류장으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대치교를 지나 왼쪽으로 올라와 탄천 2교 진입로까지 걸어왔다. 아침에 타기 싫었던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가 이 다리에서만큼은 소중한 존재로 변신할 줄 알았을까. 정류장의 디지털 번호판이 반가웠다. 이곳에 잠시 앉아 기다리면 나를 싣고 갈 버스가 정차한다는 도시의 규칙에 마음이 안도한다. 저 다리 위에서 땡볕을 가려 줄 버스가 온다. 이곳이라면 버스 안에도 사람이 많지 않을 터. 편하게 앉아서 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다. 그렇게도 아침에 타기 싫었던 버스이건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고 말았다. 환경에 따라서 이리도 쉽게 바뀌는 게 세상 이치라는 걸 깨닫는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장애물이 있으면 넘어가거나 피해 가면 그만이다. 나는 걸으면서 세상을 조금 더 알아간다. 누구나 다 아는 세상 진리를 늦게나마 가르침을 주는 양재천 길.
그리하여 나는 내가 걷는 이 길, 양재천 길이 마음에 든다. 참으로 좋다. 때로는 혼자서 건너기에 버거운 길도 나타나지만, 그냥 묵묵히 걸어본다. 내 두 발로 걸어봐야 알기 때문이다. 그 길이 힘든 길인지 쉽고 평탄한 길인지. 피해 갈 수 있는 샛길이 있는지도. 새로운 길을 찾아내듯 인생에도 새로운 길을 찾아내고 싶다. 이 길 위에서 제2막으로 가는 인생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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