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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 [이기주]

책소개/에세이

by gyaree 2017. 8. 28.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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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8.28

거리에서 혹은 카페에서 "그냥..."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청아하게 들려올 때가 많다. 퇴근길에 부모는 "그냥 걸었다"는 말로 자식에게 전화를 걸고 연인들은 서로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라며 사랑을 전한다.

"그냥"이란 말은 대개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만,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후자의 의미로 "그냥"이라고 입을 여는 순간 '그냥'은 정말이지 '그냥'이 아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중에 '그냥'이 있다. 와이프에게 날아온 카톡 문자 "뭐 해"라고 묻는 말. 나는 그저 잠시 침묵을 하다가 '그냥'이라는 답장을 보낸다. 이 '그냥'이라는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된다. 길게 주저리주저리 설명하기도 그렇고 뭐라 말하기도 딱히 떠오르지 않을 때 '그냥'이라는 단어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낱말이다. 부정도 긍정도 없는. 예전엔 똑같이 '그냥'이라는 답 문자를 보내면 "그냥이 뭔데?"라고 다시 묻는 문자가 왔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내가 보낸 '그냥'이라는 문자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와이프도 '그냥'이라는 함축된 의미를 아는 것일까?  



"차장님, 요즘 육안으로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위폐가 많다고 하던데요?"

"네. 그럴수록 진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해요. 가짜를 걸러내려면 진짜를 잘 알아야 하죠."

"그렇군요. 그래도 가짜를 보면 뭔가 감이 온다거나 그런 게 있나요?"

"너무 화려하면 일단 수상한 지폐로 분류합니다."

"네? 화려한 게 위폐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씀인가요?"

"위폐는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꾸민 흔적이 역력해요. 어딘지 부자연스럽죠. 가짜는 필요 이상으로 화려합니다. 진짜는 안 그래요. 진짜 지폐는 자연스러워요. 억지로 꾸밀 필요가 없느니까요."

진짜는 일부러 애쓰지 않는다. 꾸미지도 않는다.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자연스럽고 빛을 발할 수 있다. 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화려하게 꾸밀 필요 없이 '그냥' 덤덤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 된다. 간결하게 쓰되 거짓 없이 진짜인 양 떠들 필요도 없다. 


위로는

헤아림이라는 땅 위에

피는 꽃이다.


상대에 대한 '앎'이 빠져 있는 위로는 되레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대의 감정을 찬찬히 느낀 다음, 슬픔을 달래 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린 박자로 꺼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본다.


맘에도 없는 쓸데없는 위로는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 살다 보면 위로를 해야 할지 말지 망설여지는 때가 있다. 나와는 친분도 쌓은 적이 없는 어떤 협회의 일원으로 소속되어 협회원 가족의 부고 소식을 접했을 때. 협회 단톡방에는 애도의 문자가 올라온다. 이럴 때, 나도 같이 위로의 문자를 넣어야 하는지 망설여진다. 상대에 대한 '앎'이 없는 상태. 그냥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문자를 쓰고 만다. 상대방의 슬픔을 달래는 것이 아닌, 의례적으로 해야만 하는 행위로써 위로의 문자는 이미 화면 위로 스크롤 된다.    


특히 체념은 슬픈 단어다. 국어사전에 실린 체념의 정의는 이렇다.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하는 것.'

무서운 이야기다. 희망을 삼켜버린다니.... 이런 까닭에 오지 탐험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곧잘 한다.

"조난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건 식량 부족도 체력 저하도 아닙니다. 조난자는 희망을 내려놓는 순간 무너집니다. 체념은 삶에 대한 의지까지 꺾습니다."

얼마 전 내가 사는 아파트 7층에서 떨어져 삶을 마감한 16살 청년이 떠오른다. 아침에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간 아파트 1층 현관 입구 앞에 사내 남자아이가 누워있다. 그 주위로 119대원 세 명. '갑자기 심장이 정지해서 쓰러졌나?'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딱딱한 타일 바닥에 누워 이미 정신이 나간 듯, 그래도 숨은 붙어 있었다. 가까이 가 자세히 보니 무어라 중얼중얼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상태는 심각했다. 사람의 숨이 끊어지기 바로 전의 웅얼거림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았으면 좋겠다.' '살았으면 좋겠다.'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급히 출동한 119대원 세 명이 어린 청년의 생을 끊기지 않게 하려고 조치를 하고 있고, 옆에 있던 아파트 경비 아저씨에게 빨리 가족을 찾으라고 말한다. 119 대원 중 한 명이 "위에서 떨어진 것 같아요."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청년의 왼쪽 다리가 부러졌는지 압박 붕대를 감고 있다. 하얀 붕대 아래엔 이미 청년의 피가 흥건히 바닥 타일을 적셨다.


'제발, 살아라!'

'제발, 죽지 말아라!'


어떤 이유가 있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너무 어리니까. 안타까운 마음. 남의 자식이라 해도 정말 꽃다운 나이에 제대로 꽃잎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다는 것이 가슴이 너무 스리다. 결국, 병원 이송 중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난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건 식량 부족도 체력 저하도 아닙니다. 조난자는 희망을 내려놓는 순간 무너집니다. 체념은 삶에 대한 의지까지 꺾습니다." 라는 오지 탐험가의 말처럼 고등학교 1학년 청년은 '체념'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청년이 그런 선택을 한 원인은 학교 공부가 있을 수 있고, 부모와의 관계, 친구들의 시달림 또는 왕따 문제로 추측해본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청년 자신도 수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어려운 상황을 누군가는 잘 이해해주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희망을 내려놓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희망이 사라진 환경에서 삶에 대한 의지까지 스스로 지웠을지 모른다. 안타깝고 안타깝다. 어른들이 잡아주지 못한 것이. 


그런데 참, 웃긴 것은 그런 슬픈 죽음에 이웃 어른들은 소문을 실어 나른다.

"걔 엄마가 계모래요."

"아빠한테 어제저녁 엄청 혼났대요."

"죽었을 거예요."  


와이프의 카톡으로 전해지는 동네 엄마들의 단톡방. 어린 청년의 슬픔을 서로 보듬고 아파하는 것이 아닌, 그냥 가십거리로 생각하는 듯한 매정한 문자들의 향연.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마도 죽었을 거야'라고 하는 문자들. 사람에 대한 죽음, 그것도 너무나도 어리고 젊은 아이의 죽음 앞에 쉽게 써재끼는 문자가 나는 이상하다. 아이가 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보다도 그 집의 상황이 궁금한 것이다. 자신들의 내면에선 안타까운 마음이야 있을지 모르지만, 소문만 퍼 나르는 듯한 무의미한 문자는 반갑지 않다.


어린 사내아이의 죽음을 보며 다시 한번 '체념'이라는 단어가 주는 처참한 결과에 놀랄 뿐이다.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하는 것.'  


정말 힘들고 살기 힘들 때 이 '체념'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자.


나도 모르게 높은 빌딩 옆을 지날 때면 고개를 위로 들게 되는 버릇이 생겼다. 

누군가 또.....





동그라미가 되고 싶었던 세모


옛날 옛적에 세모와 동그라미가 살았습니다.

둘은 언덕에서 구르는 시합을 자주 했는데 동그라미가 세모보다 늘 빨리 내려갔습니다.


세모는 동그라미가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달라지기로 했습니다.

동그라미를 이기기 위해 

언덕에서 끊임없이 구르고 또 굴렀습니다.


어느새 세모의 모서리는 둥글게 다듬어졌습니다.

이제 동그라미와 비슷한 빠르기로 

언덕길을 내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구를 때 잘 보이던 

언덕 주변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고, 구르는 일을 쉽게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세모는 열심히 구른 시간이 아까웠습니다.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겉모습이 거의 동그라미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세모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아이가 됐던 어른이 됐건 나보다 하나를 더 가진 사람은 부럽기만 하다. 

"나는 왜 없어? 나도 하나 줘"

과자 봉지에 몇 개 남지 않은 과자를 가지고 네가 더 크고 많이 먹었다느니, 너는 아까 먹었으니까 남은 건 내거라고 싸우는 아들 딸내미. 누나한테 뺏길까 봐 재빨리 입속에 전부 털어 넣는 아들내미의 야속함에 드디어 딸내미의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곁에서 지켜보면 둘 다 과자를 먹은 양은 비슷하다. 남의 떡이 커 보이듯, 자신이 먹은 과자는 항상 상대방의 것보다 적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집은 과자가 상대방 것과 비교해 작으면 싸움이 시작된다. 

어른이라고 해서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살면서 타인이 가진 것을 부러워해 본 적이 있거나, 나와 비교해 풍족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처럼 드잡이하면서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늘 비교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로 인해 상대적인 빈곤감을 느끼며 머릿속이 늘 피로하다. 물론 풍족하지 않은 삶은 몸을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한다. 그래서 상대방이 가진 것을 늘 부러워만 한다. 빨리 구르는 동그라미가 부러운 세모는 그래도 '노력'이라는 것을 통해 동그라미에 가깝게 간다. 구르고 굴러 자기 몸에 상처가 나고 피가 터져도 마냥 부러운 존재였던 동그라미가 되기 위해서. 최소한의 노력을 다하는 세모의 모습은 오히려 멋지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렇게 동그라미가 된 세모는 늦게나마 세모 시절의 좋았던 자신의 모습도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 또한 남들과 비교해 "왜, 나만 이럴까?" 하는 탄식만 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동그라미가 되고자 하는 세모의 피나는 노력이라도 해봤을까? 동그라미가 되고 나중에 후회가 들 망정.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하며 살고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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