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으로 '권도경 선생님 사모님께'라는 편지를 읽다가 버스 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책을 읽다가 이런 느낌을 받을 때 너무 행복하고 좋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은 알 듯한 기분이 든다.
결혼 후 난임 치료를 받다 두 번의 유산 끝에 영우를 가졌고, 다섯 번이 이사 끝에 집을 샀다. 모두 지난 십 년간 정신없이 벌어진 일들이었다. 아파트를 얻은 뒤 아내는 휴일마다 베란다에서 계속 무언가를 자르고, 칠하고, 조립했다. 우리가 십 년 가까이 쓴 침대와 의자, 식탁과 수납장을 '리폼'했다. 갈색 의자에 크림색 페인트를 입힌다든가 낡은 탁자에 감귤빛 페인트를 발라 분위기를 화사하게 바꾸는 식이었다. 아내는 영우가 톱이나 못, 망치 근처로 오지 못하게 베란다 문을 꼭 잠그고 일했다. 영우는 베란다 유리문에 코를 박고 울거나 떼를 썼다. 그럴 땐 영우를 번쩍 안아 놀이터로 데려갔다. 이사 후 몇 달 동안 집에서 페인트와 접착제, 광택제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북유럽 스타일 가구' 또는 '스칸디나비아 패브릭'을 알아보다 가격에 낙담한 아내가 나름 택한 자구책이었다. 아내에게는 정착의 사실뿐 아니라 실감이 필요한 듯했다. 쓸모와 필요로만 이뤄진 공간은 이제 물렸다는 듯 못생긴 물건들과 사는 건 지쳤다는 듯. 아내는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했다.
이수가 공부를 그만둔 계기는 '도화'였다. 이수는 도화가 '어디 가자' 할 때 죄책감 없이 나서고 친구들이 '놀자' 할 때 돈 적정 없이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건 사소한 갈등에 속했다. 당시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 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내는 걸 감내하는 거였다. 게다가 도화는 국가가 인증하고 보증하는 시민이었다. 반면 자기는 뭐랄까,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애매한 성인이었다. 이 사회의 구성원이되 아직 시민은 아닌 것 같은 사람이었다. 입사초 수다스러울 정도로 조직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던 도화가 어느 순간 자기 앞에서 더이상 직장 얘길 꺼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이수는 모든 걸 정리하고 노량진을 떠났다.
단어 하나에 여러 기억이 섞여 뒤엉키는 걸 알았다.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안에서 여러 번의 봄과 겨울을 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연인의 젊은 얼굴이 떠올랐다. 교회 식당에서 "도화씨가 좋아하는 거 같아 잔뜩 집어왔어요"라고 말하며 흰색 플라스틱 그릇 위에 가득 쌓인 동그랑땡을 자랑하던 모습과 옆면이 새카매진 한국사 교재, 베갯잇에 묻은 흰 머리카락, 눈가 주름, 살냄새 그런 것이 밀려왔다. 한겨울, 도화가 오들오들 떨며 현관문을 열면 따뜻한 두 손으로 언 귀를 녹여주던 모습과 여름이면 도화쪽으로 바람이 더 가도록 선풍기 각도를 조절해주던 이수의 옆얼굴도. 그때서야 도화는 어제 오후, 주인아주머니를 만난 뒤 자신이 느낀 게 배신감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수 쪽에서 먼저 큰 잘못을 저질러주길 바라왔던 것마냥.
과거가 될 만반의 자세,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러곤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 뒤 사진기를 보고 웃었다.
햇빛이 충분치 않은 공간에선 이따금 플래시가 터졌다. 사진기는 펑! 펑! 시간에 초크질을 하며 현재를 오려갔다. 플래시 소리는 낙하산 펴지는 기척과 비슷해 우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 살았다는 안도를 줬다. 운전자를 덮치는 에어백마냥 푹신한 충격을 줬다.
빛에 관해서라면 하나 더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아버지가 모닥불을 쬐듯 티브이 가까이 앉아 전자파를 쐬고 있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어릴 때 산간벽촌에서 자랐다. 이웃을 만나려면 한참 걸어나가야 하고, 해가 지면 옆 사람 손도 안 보일 정도로 캄캄했다는 마을에서. 눈이 오면 아 입을 벌려 겨울을 맛보고, 비가 오면 명상에 잠긴 대지가 허밍하는 소리를 엿듣고, 가끔은 어른들로부터 귀신 비위 맞추는 법을 배우기도 하면서. 벌써 반세기 전 일이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뭐랄까, 아버지는 다른 '시대'가 아닌 다른 '세계'에 살다 이쪽으로 넘어온 기분이 든다고 했다. 분명 다 겪은 일인데 어느 때는 자기 인생이 어디서 읽었거나 들은 얘기처럼 느껴진다고.
'다른 집' 사람이 된 뒤에도 '우리집' 행사를 챙기는 건 아버지가 자주 해온 일 중 하나였다. 두 눈을 가린 사람이 손끝 감각에 의지해 사물의 이름을 알아맞히듯, 아버지는 '선물'의 형식을 빌려 인생의 중요한 마디마디를 더듬고 기념하려 애썼다. 내가 알기론 형편이 정말 어려울 때조차 그랬다. 어머니와 헤어진 뒤 아버지는 매달 규칙적으로 우리에게 생활비를 보내왔다. 처음 몇 년은 백만원씩, 어느날부터 팔십만원씩. 나중에는 오십, 삼십으로 내려간 걸로 안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보내왔다는 것도. 그러다 마지막으로 보낸 액수가 이만 몇천원이었던가. 입금이 늦어질 경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반드시 연락했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겨울, 방 한쪽에 잘 개어놓은 이불 같은 사람. 반듯하고 무겁고 답답한 사람.
그러니 언젠가부터 아버지의 안부가 뜸해졌다면 그건 아버지가 무심해진 탓이 아니라 당신 아들이 웬만한 사회적 의례를 다 마칠 만큼 나이든 까닭이었다. 당신 인생에도 내 삶에도 더이상 박수 치며 축하할 일이 생기지 않는 까닭이다.
1월. 연이은 한파와 폭설 속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분주해 보였다. 반면 차창 너머 여름은 느긋했다. 푸르고 풍요롭고 축축해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된 정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손에 스마트폰이 아닌 스노볼을 쥔 기분이었다. 유리볼 안에선 하얀 눈보라가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인. 시끄럽고 왕성한 계절인, 그런.
버스는 '도시가 아니면서 도시가 아닌 것도 아닌' 공간을 한참 가로질렀다. 미분양 아파트와 아웃렛, 비닐하우와 공장, 공원묘지와 화원, 진흙오리구이며 장어구이 따위를 파는 보양식당과 프로방스풍 모첼을 비껴갔다. 수도와 지방의 이음매는 무성의하게 시침질해놓은 옷감처럼 거칠었다. 어둠 너머론 논과 밭이 지루하게 계속 이어졌다.
대학은 대학인지라 봄에는 연두가, 가을에는 주황이 어여뻤다. 애들은 애들인지라 순수한 동시에 예민했고 가끔은 탄식이 나올 정도로 교만하거나 무지했다. 캠퍼스 안에는 성적 괴팍함과 도덕적 우월감이 섞인 채 부유했다.
-나는 행복해요.
인간의 복잡한 감정이랄까 거짓말을 분간 못하는 기계를 시험하듯 건넨 말이었다. 시리는 건전하고 또박또박한 말투로 침착하게 답했다.
-덕분에 저도 행복해지는 것 같아요.
몸통 가득 하얗게 허물 덮인 열꽃이 보였다. 몸속에서 작은 수류탄이 무수히 터져 생긴 흔적 같았다. 허공에 파열의 잔상을 남긴 뒤 불꽃 모양 그대로 굳어버린 재 같았다. 현석은 아마 눈이 아닌 손으로 먼저 알았을 거다.
우편함에 각종 고지서와 전단지가 가득했다. 내 것과 남편 이름이 뒤섞인 종이 뭉치를 가슴에 안고 승강기에 올랐다. 그러곤 현관 앞에 서서 당신 것과 내 생일을 섞어 만든 비밀번호를 눌렀다. 한 달 남짓 집에 고인 미지근한 공기가 바깥바람과 만나 몸을 뒤척였다. 신발장 앞에 캐리어를 세워두고, 우편물을 부엌 식탁 위에 던진 뒤 안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쓰러졌다. 고요하고 어둑한 안방에서 '우리집 냄새'가 났다. 당신과 같이 만든 냄새였다. 침대에 엎드린 채 목덜미와 아랫배를 몇 번 긁적였다. 붉은 반점은 한국에서부터 내 몸에 들러붙어 영국까지 따라왔다, 기어이 같이 귀국했다. 농작물을 해치는 메뚜기떼처럼 우르르 몰려와 성실하게 내 몸을 갉았다.
며칠 전 지용이가 꿈에 나왔습니다.
아마 집 떠난 지 백 일쯤 돼 그랬나봐요.
누나 잘 지내?
평소처럼 인사하는데 그새 키도 크고 눈빛도 자라 조금 놀랐어요.
누나 잘 지내는지 보려고 왔어.
지용이가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누나 나 키워주고 업어줘서 고마워.
누나 혼자 있다고 밥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먹어.
누나, 나 이제 갈게.
누나 사랑해.
실은 부끄럽게도 오랫동안 생각 못했는데, 꿈에서 지용이를 보고 나서야 권도경 선생님과 사모님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지금도 지용이가 너무 보고 싶어요. 사모님도 선생님이 많이 그리우시죠? 그런 생각을 하면.....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요. 이런 말은 조금 이상하지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 편지를 써요.
겁이 많은 지용이가 마지막에 움켜쥔 게 차가운 물이 아니라 권도경 선생님 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놓여요. 이런 말씀 드리다니 너무 이기적이지요?
평생 감사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고, 평생 궁금해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때 권도경 선생님이 우리 지용이의 손을 잡아주신 마음에 대해
그 생각을 하면 그냥 눈물이 날 뿐, 저는 그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거든요.
사모님, 혼자 계시다가 밥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드세요.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한 자 한 자 그 글씨를 따라가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요'라는 부분에선 그만 쓸쓸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언젠가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라 물었을 때, 시리가 같은 대답을 들려준 적이 있어서였다. 편지지 위 삐뚤빼뚤한 글씨를 좇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흐려졌다. 눈앞에 얼룩진 문장 위로 지용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살려주세요. 소리도 못 지르고 연신 계곡물을 들이키며 세상을 향해 길게 손 내밀었을 그 아이의 눈이 아른댔다. 당신을 보낸 후 줄곧 보지 않으려 한 눈이었다. 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잠시라도, 정말이지 아주 잠깐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 내 생각은 안 났을까. 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 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 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편지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식탁 모서리를 잡았다. 어딘가 기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혼자 남은 그 아이야말로 밥은 먹었을까. 얼마나 안 먹었으면 동생이 꿈에까지 나타나 부탁했을까. 참으려고 했는데 굵은 눈물방울이 편지지 위로 투둑 떨어졌다. 허물이 덮였다 벗어졌다 다시 돋는 내 반점 위로, 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얼룩 위로 투두둑 퍼져나갔다. 당신이 보고 싶었다.
여름을 맞는다.
누군가의 손을 여전히 붙잡고 있거나 놓은
내 친구들처럼
어떤 것은 변하고 어떤 것은 그대로인 채
여름을 난다.
하지 못한 말과 할 수 없는 말
해선 안 될 말과 해야 할 말은
어느 날 인물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인물이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말은 무얼까 고민하다
말보다 다른 것을 요하는 시간과 마주한 뒤
멈춰 서는 때가 잦다.
오래전 소설을 마쳤는 데도
가끔은 이들이 여전히 갈 곳 모르는 얼굴로
어딘가를 돌아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들 모두 어디에서 온 걸까.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고 싶을까.
내가 이름 붙인 이들이 줄곧 바라보는 곳이 궁금해
이따금 나도 그들 쪽을 향해 고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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