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이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살짝 의문이 들었다. 분명히 소설이라고 했는데 읽다 보니 에세이 같기도, 소설 같기도, 시집 한 권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책 한 권에서 세 가지 장르를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흰' 것과 관련된 단어로 책을 쓸 생각을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도 가끔은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를 단어장에 마구 적어보기는 하지만 정작 그 단어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단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세상에 있는 만물 중에 흰색을 띠는 걸 적어보라고 했을 때, 과연 몇 단어나 적을 수 있을까. 한강 작가의 '흰'에서 나오는 하얀 것과 관련된 단어들은 제각각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이야기 하나하나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이어져 나간다. 앞에 나왔던 흰색의 단어들이 다음 장에 자연스럽게 녹아내린다.
'이런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른다'라는 표현은 정말 마음에 쏙 드는 문장이다. 작가가 표현한 구절구절마다 정말 심장을 문지르고 문질러서 짜낸 엄선된 문장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결코 가볍게 쓰지 않은, 그야말로 백지에 꾹꾹 눌러쓴 흔적은 독자에게 몇 번씩 다시 읽게 하는 힘을 가졌다.
특히 아기를 혼자 출산하는 엄마의 아슬아슬한 상황의 묘사와 그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짧았던 이승에서의 시간을 그려낸 '배내옷' 편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살지 못할 거라는 확신을 가진 엄마가 아기에게 할 수 있었던 말.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엄마는 이 아기가 살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기에 더더욱 죽지 말라고 속삭였던 것 같다. 그 슬픔을 고스란히 혼자서 견뎌야 했던 엄마. 이야기 후반부 '작별'에서는 그 엄마의 딸이자 작가 자신인 듯한 화자가 먼저 세상을 떠났던 언니에게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고 말한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 인사라고 믿으며.
이 책에서 흰색은 삶의 시작이자 끝이 아닐까 한다. 태어나서 하얀 강보로 덮인 아기는 죽어서도 하얀 강보 그대로 땅에 묻힌다. 생각해보면 하얀색은 시작을 뜻하는 것 같다.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하얀 종이 위에서 시작한다. 처음부터 검은 종이나 색깔 있는 종이로 시작하는 예는 거의 없다. 하얀 백지 위에서 단어는 문장이 되고 문장은 글이 되며, 그 글은 사람들에게 여운을 준다. 시작하는 의미로 하얀색을 이길만 한 것이 있을까 싶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끝, 다시 말해 죽음의 의미도 마찬가지로 흰색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안타깝게 죽은 아기를 하얀 천으로 싸서 산으로 올라가 묻었다는 아빠의 말은 그대로 죽음으로 이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한마디로 생과 사는 '흰'색이라 요약해본다.
한 단어씩 적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이것을 쓰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변화시켜줄 것 같다고 느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고. 하지만 며칠이 지나 다시 목록을 읽으며 생각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단어들을 들여다보는 일엔?
활로 철현을 켜면 슬프거나 기이하거나 새된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면 어떤 문장들이건 흘러나올 것이다. 그 문장들 사이에 흰 거즈를 덮고 숨어도 괜찮은 걸까.
눈처럼 하얀 강보에 갓 태어난 아기가 꼭꼭 싸여 있다. 자궁은 어떤 장소보다 비좁고 따뜻한 곳이었을 테니, 갑자기 한계 없이 넓어진 공간에 소스라칠까봐 간호사가 힘주어 몸을 감싸준 것이다. 이제 처음 허파로 숨쉬기 시작한 사람. 자신이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방금 무엇이 시작됐는지 모르는 사람. 갓 태어난 새와 강아지보다 무력한, 어린 짐승들 중에서 가장 어린 짐승.
막 서리가 내린 초겨울이었다. 스물세 살의 엄마는 엉금어금 부엌으로 기어가 어디선가 들은 대로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했다. 반짇고리 상자를 뒤져보니 작은 배내옷을 만들 만한 흰 천이 있었다. 산통을 참으며, 무서워서 눈물이 떨어지는 대로 바느질을 했다. 배내옷을 다 만들고, 강보로 쓸 홑이불을 꺼내놓고, 점점 격렬하고 빠르게 되돌아오는 통증을 견뎠다.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몸에다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마라 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만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꼭 감겨 있던 아기의 눈꺼풀이, 한 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써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이 도시의 외곽에서 그녀는 나비를 보았다.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십일월 아침 갈대숲 옆에 날개를 접고 누워 있었다. 여름이 지나고는 나비들을 전혀 보지 못했는데, 그동안 어디서 버텨왔던 것일까? 지난주부터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졌는데, 그사이 날개가 몇 차례 얼었다 녹으며 흰빛이 지워졌는지 어떤 부분은 거의 투명해 보였다. 바닥의 검은 흙이 어른어른 비쳐 보일 정도였다. 시간이 좀더 흐르면 남은 부분도 완전히 투명해질 것이다. 날개는 더이상 날개가 아닌 것이 되고, 나비는 더이상 나비가 아닌 것이 된다.
엉망으로 넘어졌다가 얼어서 곱은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던 사람이, 여태 인생을 낭비해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눈송이가 성글하게 흩날린다.
가로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검은 허공에.
말없는 검은 나뭇가지들 위에.
고개를 수그리고 걷는 행인들의 머리에.
부서지는 순간마다 파도는 눈부시게 희다. 먼 바다의 잔잔한 물살은 무수한 물고기들의 비늘 같다. 수천수만의 반짝임이 거기 있다. 수천수만의 뒤척임이 있다(그러나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어느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캄캄한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덮혀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이제 그녀는 더이상 단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따름 각설탕이 쌓여 있는 접시를 보면 귀한 무엇인가를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물큰하게 방금 보도를 덮은 새벽 눈 위로 내 검은 구두 발자국들이 찍히고 있었다.
백지 위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떠날 때 아직 여름이었던 서울이 얼어 있었다.
뒤돌아보자 구두 발자국들이 다시 눈에 덮이고 있었다.
희어지고 있었다.
무서운 예감이 든 어머니가 이불을 조금씩 흔들어볼 때마다 아기의 눈이 열렸지만 곧 흐려지며 감겼다. 그나마 언젠가부터는 흔들어도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벽이 되기 전 마침내 어머니의 가슴에서 첫 젖이 나와 아기의 입술에 물려봤을 때, 놀랍게도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의식 없는 상태로 아기가 젖을 물고 조금씩 삼켰다. 점점 더 삼켰다.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 지금 자신이 넘어오고 있는 경계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
죽지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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