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는 컴퓨터 공학자다. 인공지능 컴퓨터를 연구하는 연구소의 소장이자 열세 살 짜리 영민한 딸을 둔 아버지. 데이비드는 딸 에이더와 단둘이 살아가는 싱글 파파다. 데이비드의 연구소 식구들을 초대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제 열세 살인 에이더는 연구원들의 수준 높은 대화에도 같이 동참할 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빠가 연구하는 인공지능 시스템에 동참하게 된다. 에이더는 다른 집 아이들처럼 학교에 다니지 않고 아빠의 연구소로 출근한다. 매일 그곳에서 박사들과 어울려 아빠가 쌓은 지식을 배워나간다. 데이비드가 에이더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홈스쿨링으로 대체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딸이 기성 사회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의 진짜 존재가 드러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딸인 에이더를 자기가 방어막을 쳐놓은 테두리 안으로 가두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에이더는 또래가 즐기는 문화와는 동떨어진 생활을 해왔다. 그런 에이더가 유일하게 또래 친구를 만날 기회는 데이비드 연구실의 동료이자 절친 리스턴의 집이다. 그녀의 세 아들 윌리엄, 그레고리, 매티 이들이 전부였던 소녀 시절.
언제부턴가 데이비드가 에이더에게 말도 없이 사라지는 날이 늘어난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그는 딸에게 솔직히 말하려 하지만 너무 어린 딸에게 큰 상처가 될까 말하지 못한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근처에 사는 리스턴이 유일하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 암호 풀기 훈련을 한 에이더였기 때문에 언제라도 충분히 풀 수 있다는 생각에 암호를 걸어 플로피 디스크 한 장을 남겼다. 완전히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에 자신의 과거가 담긴 내용을 만들어 저장해 놓았다. 결국, 데이비드는 요양원으로 가고 에이더는 열세 살 어린 나이에 혼자 남아 리스턴의 집에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요양원에 찾아간 에이더는 그곳에서 자신의 아빠가 데이비드 시벨리우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로 인해 모든 게 부정당하는 절망감에 빠진다. 자신을 키워준 사람 데이비드는 도대체 누구인지. 그 사실을 밝혀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플로피 디스크에 남긴 암호를 풀어야 한다. 하지만 아빠와 같이 일했던 연구소의 동료들조차 암호를 풀어내지 못한다. 아마도 알츠하이머병이 걸린 후에 만들어진 암호 같다는 하야토의 말. 끝내 그들은 암호를 풀지 못한다. 홀로 남겨진 에이더에게 힘이 되어준 리스턴의 둘째 아들 그레고리. 어릴 때부터 둘은 의외로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컴퓨터를 좋아하는 점, 학교에서 외톨이. 그레고리는 그런 에이더에게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다. 둘은 힘을 합해 아빠 데이비드의 과거를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아무리 해도 풀지 못한 플로피 디스크의 암호는 비로소 그들이 어른이 된 후,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그레고리의 도움으로 풀어낸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마지못해 묻어두어야 하는 이야기 혹은 그 진실을 들추어냈을 때 상대방이 받을 충격이 두려워 감추거나 말하고 싶어도 기회를 놓쳐버리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감춰두었던 진실을 말함으로써 누군가가 다친다면 과연 그 진실을 말하는 것이 좋을까. 만약 그 누군가가 사랑하는 딸이라면 어떨까? 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으나 진실을 감추고 살아야만 하는 사람. 이 이야기에서는 데이비드가 그렇다. 아빠가 말하지 못한 진실을 찾기 위해 이 소설에서는 1920년대 미국의 대공황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1940년대 후반 공산주의와 동성애자를 같은 시선으로 보는 미국 사회상을 말한다. 그 시대가 받아주지 않았던 데이비드의 정체성. 그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감추는 삶을 살았다. 데이비드의 삶을 통해 미국 사회가 변화하는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역사물을 읽는 느낌마저 든다. 또 한편으로는 128k 맥킨토시에서 보이듯 개인 피씨나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로부터 현대의 가상현실로 이어지는 기계 문명의 발전을 보여주는 미스터리 과학 소설의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래도 가장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아빠의 딸에 대한 사랑이라 말하고 싶다. 이 이야기에서 [보이지 않는 세상]은 무엇일까? 딸에게 말하지 못한 데이비드의 숨겨두었던 과거일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라도 에이더가 자신의 본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고 싶었을 것이다. 즉, 인공지능 프로그램 엘릭서는 아빠와 딸을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세상인 것이다. 언젠가는 딸이 성장해서 그 안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찾기를 바라는.
"너와 나누는 대화가 가장 그리울 거야."
아빠의 유언 같은 한마디. 이 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기억이 사라질 것을 아는 아빠의 말. 이 대사로 인간의 마지막을 돌이켜 본다. 인간이 생을 다하는 순간이 다가오면, 그 마지막에 머리와 가슴에 남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소중히 쌓아온 추억이라는 것. 딸과 나누었던 많은 대화는 어떤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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