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지만 이 꽃은 내 어릴 적 간식이었다. 심지어 이쁜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고 빨간 꽃잎을 따서 쫍쫍쫍 소리를 내며 꿀만 빨아 먹었고 바닥에 내버린 꽃이다. 어릴 때는 이 꽃의 이름도 몰랐다. 나를 포함해 친구들 누구도 이 꽃의 이름을 아는 아이는 없었다. 그저 꿀 따먹는 꽃. 일명 '꿀단지 꽃'이라고 불렀다. 친구들과 이 꽃이 피어 있는 곳을 발견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곧바로 100m 전력 질주가 시작된다. 서로 먼저 많이 먹겠다는 욕심에 쏜살같이 달려든다. 공짜는 아이들도 환장하게 만든다는 진리를 아마도 이때 알게 된 것은 아닐까. 뜀박질이 느린 나는 고작 몇 개의 꽃잎만 얻어 그 작은 꽃잎을 있는 힘껏 쪽쪽 빨아댔다. 동작이 잽싼 녀석들은 두 손에 한 움큼 쥐고서 만찬을 즐기는데, 나는 몇 개 얻은 꽃잎이 아까워 꽃의 꿀을 한 톨도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로 흡입했다. 꽃잎을 많이 딴 녀석들은 대충 서너 번 꿀을 빨아 먹더니 땅바닥으로 내뱉었다. 승자의 거만함을 유세 부리듯 맛있게 쫍쫍 큰 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빨아대던 녀석들. 우리들은 꿀벌의 식량을 먹어치우며 마냥 즐거워했다.
양재천 우면교 근처에서 이 꽃을 만났다. 내가 맛있게 따 먹던 바로 그 꽃 같았다. 어렴풋하게 어린 시절 꽃잎을 따던 내 손이 오버랩됐다. 똑하고 뜯어내는 감촉. 끝이 하얗고 투명한 꿀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정말 달콤했던 꿀단지. 그런데 나는 아직도 이 꽃의 이름을 모른다.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어릴 적 내게 달콤한 기억을 심어준 그 꽃의 존재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40여 년이 지나서야 이 꽃의 이름을 알고 싶어 검색했다.
'깨꽃'
난생처음 듣는 낯선 이름이었다. 꿀을 따 먹던 기억과 사뭇 다른 이름. 꿀을 담고 있는 꽃인데 깨꽃이라니. 심지어 과명도 꿀풀과라고 나와 있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어디를 봐도 깨가 쏟아질 것 같지는 않다. 저 빨간 꽃에 깨보다는 꿀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도대체 깨꽃이 뭐람. 어린 시절 기억과 너무 다르고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아 다시 검색했다. 분명히 꿀단지에 어울릴만한 또 다른 이름이 있을 거라고. 깨꽃은 내 어릴 적 달콤한 기억을 깡그리 지워버리는 지우개 같은 느낌이랄까. 검색 결과가 핸드폰 액정화면에 떴다. 역시 다른 이름이 있다.
'샐비어(Salvia), 사루비아'
샐비어는 몰라도 사루비아는 익히 들어본 이름이다. 이제야 꿀단지 꽃에 어울리는 느낌이 든다. 뭐 꼭 영어 발음이라고 해서 그런 느낌이 드는 건 아니다. 꿀이라는 단어에 조금 더 어울리는 쪽은 깨꽃보다는 사루비아가 아닐는지. 아무튼 나는 40여 년 만에 꿀단지 꽃의 정체를 알게 되어 미안한 마음은 사라졌다. 이제라도 너의 존재를 알았으니 꿀단지 꽃이 아닌 사루비아로 불러 줄게. 우리말 깨꽃으로 부르고 싶지만, 이 꽃만큼은 사루비아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네 안에 머금고 있는 맛있는 꿀을 쫍쫍 소리를 내며 빨아먹으며 옛날을 회상하고 싶다. 하지만 이제 쑥스럽다. 나이가 든 탓일까? 그래도 너의 존재를 정확히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너의 달콤한 꿀을 그때처럼 쫍쫍 소리를 내며 빨아 먹지는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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