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여! 그대여. 다시 사랑하고 싶지만, 너무 늦었잖아요. 우리 사랑하기엔… 하기엔….
나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음악시간이 제일 싫었다. 우리 집안이 음주가무 중 음주는 뛰어나지만, ‘가무’는 그리 기질이 타고난 집안은 아니다. (할아버지, 아버지로 인해 술만 생각하면 치가 떨릴 정도지만) 음주는 피를 이어받아 어느 정도는 한다. 그런데 이 ‘가무’만큼은 도저히 안 된다. 아버지의 노래를 들어 본 기억이 없을 정도니. 나도 그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 학교 수업 중 음악시간이 제일 어려운 시간이다.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한 명 한 명씩 따라 부르는 노래 수업. 워낙에 음치이다 보니 자신이 있을 턱은 없다. 간단한 몇 마디조차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음정, 박자 맞추기가 너무 힘들었다. 도통 감이 없다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학창 시절 노래를 입 밖으로 내는 일은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연히 그때도 아는 노래가 거의 없었다. 그 흔한 노래방도 인생을 통틀어 서너 번 간 것이 전부다.
그런데 이런 내게도 심금을 울리는 가수가 나타났다. 고등학생이었던 그때. 변진섭과 신승훈. 이 두 가수의 노래는 음치인 나도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고선 못 배기게 했다. 따라는 부르지만 절대 잘 부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변진섭 때문에 노래라는 것을 불러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음치는 음치. 남 앞에서 자신 있게 부를 만 한 나만의 18번을 만들고 싶었지만, 역시나 무리였다. 누구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너무 창피했다. 그래도 변진섭의 노래가 녹음된 테이프는 전부 들을 정도로 좋아했다. 음치가 그나마 좋아했던 가수. ‘변진섭’
오늘도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 고가도로를 올라 학여울역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제일 뒤 창가에 앉아있다. 탄천 저 멀리서 비추는 붉은색 노을빛이 버스 안으로 들어와 내 뺨에 따뜻한 기운이 전해진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저 멀리 건물 뒤로 노을이 사라질 찰나. 익숙한 멜로디가 버스의 스피커에서 퍼진다. 버스 안 승객은 몇 명이 전부다. 바로 뇌가 신호를 보낸다. “책을 덮어.”라고. 귀에 꽂히는 노래가 재미있게 읽던 책을 덮게 만든다. 한창 절정으로 가는 대목이었는데 너무나도 익숙한 가수의 목소리.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그대여! 그대여. 다시 사랑하고 싶지만, 너무 늦었잖아요. 우리 사랑하기엔… 하기엔….
1988년 6월 15일 발매된 변진섭의 1집에 수록된 세 번째 트랙. ‘너무 늦었잖아요.’ 내 머릿속에 남아있던 익숙한 가사. 고등학생 때 너무나도 좋아했던 노래. 버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는 내지 않고 속으로 따라 흥얼거린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추억이 서린 노래를 들으니 뜻밖의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훌륭한 사운드를 자랑하는 하이앤드 스피커가 아니어도 좋다. 퀴퀴한 버스 냄새가 코를 진동해도 변진섭의 목소리는 머리와 가슴을 깨끗하게 씻어준다. 읽던 책을 다시 펼 수가 없다.
부드러운 그 입술로 내게 다가와
나를 사랑한다 말한다해도
그의 목소리와 멜로디는 집으로 향하는 지친 귀갓길에 엔도르핀이 되어 준다. 이 한 곡이 끝나고 다시 그의 다른 노래가 나오길 바란다.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이대로 주욱 책을 펴지 않고 스피커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DJ도 아닌 버스 기사 아저씨가 내 바람대로 움직일리는 만무하다. 노래방 리모컨이 있다면 다음 예약 노래 번호를 입력할 텐데. ‘홀로 된다는 것.’ ‘내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새들처럼.’ 등등. 이곳은 노래방이 아니라 달리는 버스라는 것이 못내 아쉽다.
예상대로 그의 노래는 이 한 곡을 끝으로 스피커에서 나오지 않는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나온 심금을 울리는 노래. 다른 승객에겐 아무 감흥 없는 노래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몇십 년 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노래는 이런 음치에게도 잊었던 기억과 추억을 되살려내는 신비한 약초 같다. 노래 하나가 과거로 갈 수 있게 해주니. 영화 ‘백 투 더 퓨처’의 타임머신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예전으로 날아갈 수 있게 한다. 타임머신이 되어 준 퇴근길 버스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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