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시작한 tvN의 [숲속의 작은 집]에서 교묘하게 책 두 권을 소개했다. 하나는 박신혜가 들고 있던 기욤 뮈소의 '파리의 아파트'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 집 회장(아내)이 좋아하는 '소지섭'이라는 인간이 들고 있던 사노 요코의 '죽는 게 뭐라고'였다. 내 눈에 끌린 건 기욤 뮈소보다 사노 요코 쪽이었다. 어느덧 반백 년 가까이 살았다고 '죽는 게 뭐라고'라는 제목에 끌린 것 같다. 제목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전자책 앱으로 검색했다. 아쉽게도 그 책은 없었고 대신 찾은 것이 '문제가 있습니다'였다. 핑크색 긴소매 털 스웨터를 입고 단발머리 스타일로 옆으로 누워 TV를 보는 듯한, 절대 이쁘다고 할 수 없는 여자 머리 위로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책 표지. 일단 소지섭이 보던 책은 아니었지만, 이 묘한 책 표지 그림에 끌렸다. 아마도 이쁘게 묘사된 그림이었다면 선뜻 손이 가지 않았을 텐데, 해학적인 일러스트가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을 쓴 사노 요코는 나의 아버지 세대 사람이다. 1938년 생. 할머니가 쓴 책이다. 젊고 팔팔했던 시절에 쓴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이 들어서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고 필요 없는 존재가 돼버린 노인이 됐을 때 쓴 작품이다. 최근에 내가 읽은 책들은 대부분 작가들의 이른바 전성기 나이 때 만들어진 책이다. 나이가 젊다고 해서 전성기라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걸 이 책을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책에 대해서 저자 이름을 말하는 것보다 왠지 할머니라는 호칭을 쓰고 싶어 졌다. 보통은 작가 '누구누구' 이렇게 얘기하는데 이 책에서는 할머니라고 하겠다. 그저 옆집 할머니 같은 느낌을 받았기에.
이 할머니가 중국의 베이징에서 태어나서 늙어 병들어 홀로 사는 독거노인이 될 때까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런데 그 이야기 하나하나가 너무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지루하거나 고리타분하지도 않다. 아주 담백하고 솔직하게 써나가는 할머니의 구수한 냄새가 전해지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거라면 나도 충분히 한 권 써나 갈 수 있을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풀어놓은 이야기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일생의 대부분을 활자를 읽는데 시간을 써온 사람치고는 이 책에서 지식인의 '잘난 체'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쓴 흔적이 읽는 내내 마음속으로 전해졌다. 그래서 더더욱 좋았다. 정말 편안하게 읽었던 책이었다. 인생의 황혼기에 다다른 사람에게서 어떤 글이 나올지 자못 궁금했다.
한 인간이 인생을 살아냈을 때, 책 한 권을 쓰게 된다면 나도 이런 책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책이다. 과장되지 않은 이야기, 부러 꾸미지 않은 이야기, 그냥 살아온 인생. 그냥 그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
재작년 여름, 향년 93세의 나이로 엄마가 죽었다. 죽기까지 10년 이상 치매였다. 엄마가 병에 걸리기 전엔 나와 엄마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나는 엄마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죽은 사람은 모두 좋은 사람이다.
치매란 생과 사를 잇는 다리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는 점점 다른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걸 인격이라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엄마가 정신을 놓은 후 우리는 평생의 갈등과 화해했다. 네 살 때 엄마 손을 잡으려는 나를 매몰차게 뿌리쳤을 때, 나는 엄마에게서 생리적인 혐오감을 느끼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냄새가 가장 불쾌했다.
책은 인류의 지혜로 가득하지만 그와 함께 독도 포함되어 있다. 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그 독에 영혼을 빨리고 있는 것이다. 책을 가까이 하지 말도록. 가까이 하다보면 입맛을 다시며 꿀꺽하고 싶은 것이 잔뜩 보이니까. 가까이 하지 말라니까. 읽고 싶겠지만.
스물셋에 결혼한 상대는 생전 이사 한번 안해본 사람이었다. 23년간 찬장이 같은 곳에 있었고, 같은 곳에 젓가락이 들어 있었다는데, 그 젓가락 두는 곳도 모르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그때까지 이사를 스물 몇 번 했던 나는 23년간 같은 곳에 젓가락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기겁을 했다.
나는 일생의 대부분을 활자를 읽으며 지냈다. 일한 시간보다 가사노동을 한 시간보다 글자를 보고 있었던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다 잊어버렸다. 요즘은 점점 더 잊는다. 마치 배경음악처럼 머리를 스쳐지나갈 뿐이다. 장르도 뒤죽박죽. 내 안에서 유행되었다가 제멋대로 끝나고, 한 작가의 책만 닥치는 대로 읽다가 또 다음 작가를 찾아 방랑한다.
지금 후회하고 있다. 젊을 때는 활자 안의 청춘이 아닌 살아 있는 청춘을 즐겼어야 했다. 천 권의 책 속의 연애보다 단 한 번이라도 온몸으로 경험하는 연애가 훨씬 풍요롭다.
최고의 한 권 [좀머 씨 이야기] - 파트리크 쥐스킨트
한가롭고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에 사는 소년의 나날, 어린 사랑. 그 뒤로 배낭을 짊어진 좀머 씨가 부리나케 걸어 다닌다. 매일, 총총... 총총... 내 인생에 단 한 권을 들라면 단연 이 책이다.
내 이북 서재에 바로 등록했다. 이 할머니가 꼽은 인생의 책이 어떤 건지 궁금해서 미치겠다.
나는 활자만 읽으면 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젊은 애들이 듣지도 않으면서 계속 음악을 틀어놓는 것과 마찬가지, 그러니까 배경 음악 같은 것이다. (중략)
나는 책을 읽어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이다. 인격이 고급스러워지는 것도 교양이 깊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때 그때 놀라고 싶을 뿐이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나의 변변찮은 경험이 아닌 타인의 귀중한 경험을 나눠 받기 위해서이고, 보통 사람에겐 없는 재능을 접함으로써 나의 가난한 마음을 잊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은 빨간 재능에 푹 잠긴 채 빨간 눈으로 세상을 둘러보고, 내일이면 파랑 재능에 물들어 '와, 세상이 이렇게 파랗구나' 감탄할지도 모른다. 아마 모레는 시커먼 책을 읽을 것이다. 그렇게 책은 쌓여간다. 자꾸자꾸 쌓여간다. 집이 좁다.
나는 사는 게 힘들거든. 일상이 힘들면 생활이 철학이 돼.
노인이 되어서야 내가 이 세상에 뭘 하러 왔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엔 이렇다 할 볼일이 없다. 볼일은 없는데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 이따금 아아, 살아 있구나, 하고 실감할 수 있으면 좋은 거다.
외계는 우주로 무한하게 펼쳐져 있다. 우리는 주변 일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죽는다. 그러나 인간의 내계 역시 끝없는 우주다. 외계의 우주와 마찬가지로 넓고 깊고 끝이 없다. 마음속에도 수만 광년이라는 시간이 살아 있고, 여러 개의 안드로메다 성운을 지니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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