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
페이지 65 / 2004년 봄
일이 좋다는 사람이 있다면 얼굴 한번 보고 싶다. "넌 일단 시작하면 빠르잖아. 빨리빨리 해치우면 편할 텐데." 상식적인 친구들이 충고를 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싫어, 그렇게 일하면 부자가 되는걸." "부자 되기 싫어?" "응, 싫어. 근근이 먹고사는 게 적성에 맞아. 부자들 보면 얼굴이 비쩍 말랐잖아. 돈이 많으면 걱정이 늘어서 안절부절못하는 거라고."
나는 공공기관에 가면 반드시 싸움을 벌인다. 아니, 공공기관 현관부터 시비 거는 태도로 들어간다. 언젠가 시청에 무슨 증명서를 떼러 갔는데 위임장이 없으면 안 된다고 거절당한 적이 있다.
"위임장 종이를 어딘가에서 파나요?" "아뇨, 아무 종이라도 괜찮습니다." "인감도장 찍어야 하나요?" "아뇨, 아무 도장이나 괜찮습니다." "그럼 내가 여기서 써도 되나요?" "아니요, 그건 안 됩니다." "그럼 안 보이는 데서 쓰면 괜찮나요?" "괜찮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나는 배알이 꼴렸다. "그럼 지금부터 저 기둥 뒤에서 쓸 거예요." "좋습니다." 좋다니? 나는 기둥 뒤에서 위임장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여기, 위임장이요." "네, 접수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쨌든 접수됐으니까. 하지만 기어코 한마디 던지는 나.
"필적감정 같은 거 해요?" "아니요." "그럼 다른 사람이 나인 척해도 증명서 뗄 수 있는 거잖아요." "...... 여기 원칙이니까요." "위임장 같은 건 있든 없든 마찬가지잖아요." "원칙이니까요."
나는 이런 글에서 웃음이 터진다. 그냥 불합리한 걸 못 참는 할머니의 일상인데, 읽으면서 편안해진다. 할머니와 공무원 사이에 벌어지는 현장이 바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이토록 쉽게 풀어내니.
페이지 109 / 엄마 요양 병원에서
내가 큰 소리로 웃자 엄마도 소리 내어 웃었다.
"엄마, 인기 많았어?"
"그럭저럭." 정말일까?
"나 예뻐?"
"넌 그걸로 충분해요."
또다시 웃음이 터져버렸다.
엄마도 따라 웃었다.
갑자기 엄마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여름은, 발견되길 기다릴 뿐이란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엄마, 나 이제 지쳤어. 엄마도 아흔 해 살면서 지쳤지? 천국에 가고 싶어. 같이 갈까? 어디 있는 걸까, 천국은."
"어머,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던데."
나는 아줌마다. 아줌마는 자각이 없다. 미처 다 쓰지 못한 감정이 있던 자리가 어느새 매말라버렸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서야 그 빈자리에 감정이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한국 드라마를 몰랐다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인생이 다 그런 거라고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브라운관 속 새빨간 거짓말에 이렇게 마음이 충족될 줄 몰랐다. 속아도 남는 장사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꽃 한 송이의 생명조차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죽는다는 사실이다.
페이지 217 / 누구냐
프로는 먼 곳을 바라본다. 패 건너편의 희망을. 인생은 도중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눈앞의 욕망에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먼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현재를 성실히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나는 마작 채널을 계속 시청했다.
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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