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원제는 死ぬ気まんまん(시누 키 만만)이다. 뭔 뜻이냐 하면, '죽을 의욕이 가득가득'하다는 정도가 되겠다. 한국어 제목인 '죽는 게 뭐라고'보다는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조금은 다르게 다가온다. 일본어 원제의 풀이가 더 이 할머니의 성격과 작가 사노 요코의 됨됨이와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 마디로 죽음 앞에서 당찬 할머니라는 인상.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멘틀이 붕괴된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과 죽어감 On Death and Dying]에서 죽음을 선고받아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나타나는 다섯 단계가 있다고 말했다. 부정 → 분노 → 협상 → 우울 → 수용.
그런데 이런 단계가 이 할머니에게는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되레 힘차고 씩씩하게 겁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듯 너스레를 떤다. "죽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모두가 사이좋게 기운차게 죽읍시다."라고.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
마치 종교적 신념이 아주 강한 종교계 지도자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하물며 그녀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보통은 이렇다. 어느 날 의사가 앞으로 살 날이 6개월 정도라고 말한다면, 처음엔 '거짓말이야! 거짓말일 거야.' 부정한다. 그다음엔 '왜! 왜! 나한테...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나한테 이러냐고' 분노가 치밀고 화를 참을 수 없겠지. 이 단계가 지나면 '충분히 나을 수 있어, 치료받으면 살 수 있어.' 일말의 희망을 품을지도. 그러다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은 이어지고 '살지 못한다는 절망감에 휩싸여 하루하루가 슬프고 우울해진다.' 마지막엔 이 땅에서 자신의 썩은 몸을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수용하고 죽음을 인정하며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더는 삶을 지속할 수 없다고'. 이런 단계를 밟아나가지 않을까. 사람에 따라서는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평범하게 살아온 인생이라면 이런 과정은 거칠 것 같다.
이 책의 저자 사노 요코가 죽음에 대하는 자세는 조금은 다르다. 의사 히라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에서 그녀가 왜 그럴 수 있는지 약간은 들여다볼 수 있다.
히라이 : 사노 씨의 직업이 작가이기 때문 아닐까요. 많은 책을 읽고 다양한 것들을 생각하시니까요. 결국 인간학이죠. 여러 가지를 제대로 생각하며 지내온 사람은 확실한 사생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멘털 케어가 힘들죠.
그녀가 쓴 책 [문제가 있습니다]에서도 자신은 "나는 일생의 대부분을 활자를 읽으며 지냈다. 일한 시간보다 가사노동을 한 시간보다 글자를 보고 있었던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라고 말한다. 70 평생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사람이다. 스님이 열심히 도를 닦으면 열반의 경지에 오른다고 그녀는 책을 통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떨쳐버린 건 아니었을까. 작가라는 직업이 그녀에게 많은 것을 상상하고 사색하는 힘을 주었기에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자아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의사 히라이 씨가 일본인은 죽음에 대한 문화가 없다고 말한 부분이 정말 가슴에 와 닿는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노 요코는 죽기 전까지 인간은 살아 있다고 말하며 그녀의 글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한다. 죽음을 앞두거나 그렇지 않거나 죽음에 준비하는 자세를 조금은 더 즐겁게 생각하자고.
끝으로 이성이나 언어는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이 책 한 권에 인간의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그녀의 언어가 말해준다. 고리타분한 이야기지만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먼 훗날 과학기술이 발전해서 죽지 않는 인간이 나온다는 가정을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책은 삶을 사는 인간이라면 꼭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2018/05/02 - [책소개/에세이] - 사는 게 뭐라고 [사노 요코]
2018/04/19 - [책소개/에세이] - 문제가 있습니다 [사노 요코]
페이지 41 / 끊임없는 불꽃놀이
한번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정말로 오랜만에 중학교 친구를 만났다. 그 애는 입을 열자마자 물어왔다. "넌 무슨 차 타니?" 깜짝 놀라서 "시빅(혼다의 준중형차) 타는데"라고 대답했더니, 그 후로 내게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벤츠를 탔더라면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페이지 63
찢어지게 가난했다. 나는 모든 것을 가난으로부터 배웠다. 부자는 돈을 자랑하지만, 가난뱅이는 가난을 자랑한다. 모두들 자랑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 아버지의 설교 중 이런 말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정情'이었겠지.
죽음에 대한 감상에도 1인칭, 2인칭, 3인칭이 있다는군요. '그, 그녀(3인칭)의 죽음'은 아, 죽었구나 정도로 별로 슬퍼하지 않아요. 반면 2인칭인 '당신의 죽음(부모, 자식, 형제등)'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죠. 그래도 그건 자신의 죽음이 아니에요. 1인칭의 죽음, 즉 '나의 죽음'은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인 데다 남들한테 물을 수도 없으니 어려운 거죠. 의사에게 환자의 죽음은 어떤가 하면, 그, 그녀의 죽음처럼 3인칭은 아닙니다. 환자와의 관계가 있으니 2인칭도 아니고 2.5인칭 정도 일까요.
'살아 있다는 건 무엇인가'라는 문제죠?
그렇죠.
단지 숨을 쉬기만 하면 좋은 걸까요. 인생의 질이라는 문제도 있잖아요. 무엇보다도 목숨이 소중하다는 건 이상해요.
이상하죠.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그렇게 생각해요.
페이지 116 / 죽음과 죽어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죽음과 죽어감 On Death and Dying] - 죽음의 다섯 단계
부정 - 분노 - 협상 - 우울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용이었는데, 그런 단계가 제게는 하나도 들어맞지 않더라고요.
그건 사노 씨의 직업이 작가이기 때문 아닐까요. 많은 책을 읽고 다양한 것들을 생각하시니까요. 결국 인간학이죠. 여러 가지를 제대로 생각하며 지내온 사람은 확실한 사생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멘털 케어가 힘들죠. 인생이란 이런 거랍니다, 생물이란 이런 거랍니다, 하고 설명해줘야만 하니까요. 그래서 사노 씨의 에세이 [죽는 게 뭐라고 死ぬ気まんまん]를 사람들에게 좀 더 알리고 싶어요. "죽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모두 사이좋게 기운차게 죽읍시다"라고.
아무리 냉정하고 침착한 사람이라도, 생각의 가장 안쪼과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는 본인조차 알 수 없다. 막상 부닥쳐보지 않으면 모른다. 부인도 의사도 모른다. 환자의 언어 건너편에 있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누구도 부닥쳐보지 않으면 모른다. 이성이나 언어는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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