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이야기가 좋다. 무언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나의 뇌를 간질간질하게 만들어주는. 몇 번을 읽어봐도 이해가 가지 않아 금방 졸음이 쏟아지게 하는 작품은 그저 따분할 뿐이다.
13호 캐비닛에는 이상한 서류가 가득 들어 있다. 그런데 작가는 처음부터 말한다. 13호 캐비닛에 대해 굉장한 상상을 하지 말라고 못 박는다. 심지어 우아하고 낭만적인 상상은 일찌감치 집어치우라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런 상상을 한다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라고. 작가는 서두부터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책을 읽기 시작한 독자는 이미 상상의 세계에 빠져든다.
"도대체 13호 캐비닛에 뭐가 있길래?"
주인공 공 대리의 일과는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단순히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다. 아주 쉬운 일이다. 하지만 상대방은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고 괴상한 이야기만 한다. 출근해서 첫 전화는 자신의 시간이 사라졌다는 여인의 전화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지하철을 탔다가 몇 시간이 사라졌다고 하며 공 대리에게 따지듯 얘기한다. 시간이 사라지다니? 여자는 주기적으로 시간이 사라졌다고 억울해한다. 다시 전화가 걸려온다. 이번에는 샤워하다가 자신의 성기가 사라졌다는 남자의 이야기다. 이미 상상할 수도 없는 이런 전화에 이골이 난 공 대리의 대답은 정말로 걸작이다. "밑에 잘 찾아보세요. 거기 떨어졌을지도 모르잖아요." 정말로 웃지 않을 수 없다. 말도 되지 않은 상황이 이 소설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새끼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남자. 입속에서 도마뱀을 키우는 여자. 도플갱어. 메모리모자이커. 토포러.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남녀 성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 외계 행성에 전파를 보내는 사람 등등. 앞에 열거한 것처럼 이 책에는 생소한 단어들이 눈에 띈다. 그들 모두는 정상에서 벗어난 이상한 사람들이다. 즉 새로운 종의 인류다. 흔히 돌연변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지금 세상에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공 대리가 관리하는 13호 캐비닛에는 이런 신인류의 기록이 적힌 서류가 375개나 들어 있다. 공 대리는 권 박사가 관리하던 13호 캐비닛의 파일을 몰래 보다가 들킨 죄로 이 파일을 관리하는 업무를 하게 되는데. 13호 캐비닛에 있는 변화된 종의 징후를 보여주는 사람을 '심토머'라 부른다. 현재의 인간과 새로 태어날 미래의 인간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라 말한다. 어쩌면 최후의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최초의 인간일 수도 있는 그들. 이 책은 바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초능력자들이 나오는 미국 드라마를 보다 보면 '저 캐릭터는 과연 어떤 능력이 있을까?'라는 호기심이 생기듯, 심토머라 불리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는 어떤 미지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변화된 새로운 종일뿐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삶에 걸림돌이 되어 고민하고 힘들어한다. 책에서도 심토머는 분명히 중간자의 위치에 있다고 말한다. 정상적인 사람과 미래에 태어날 새로운 종의 중간. 하지만 그들이 겪는 고민과 고통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일들이다. 예컨대 백화점 도우미로 항상 웃어야 하는 일만 하던 여자는 엄마의 장례식에서 울지 못하고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 조금은 과장될 수 있어도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현재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고민과 일맥상통한다.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올만한 괴상망측한 인물들이 실상은 지금 세상에도 존재한다는 걸 말하는 건 아닐까. 지금 세상은 정말 심토머보다 더 자극적이고 흉측하며 상상에서 벗어난 인간들이 넘쳐나니까. 이야기 속 심토머들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자신들의 아픔을 감추고 사라지거나 하면서 스스로 안고 살아간다. 오히려 키메라의(새끼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남자) 비밀을 밝혀 이용하려는 인간들. 책에서는 기업에서 보낸 사람이라 말하지만 이른바 돈과 권력을 쥔 집단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는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캐비닛 속에 있는 심토머들이 이상한 돌연변이가 아니라 힘겹게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그리고 한 가지 재미난 것은 후반부에 공 대리가 기업에서 고용한 고문 기술자에게 당하는 장면은 정말 생생하다. 이런 장면이 바로 작가의 다음 작품 [설계자]에서 나오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지막 부분은 이야기를 관통하는 부분에서 조금은 엇나갔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상황의 묘사는 정말 흥미로웠다.
2018/10/26 - [책소개/소설] - 설계자들 [김언수]
프랑스 감옥은 죄수를 포도주처럼 다룬다. 축축하고 어두운 창고에서 포도주를 숙성시키듯 달콤하고 쌉쌀한 맛이 날 때까지 오래도록 죄를 숙성시킨다. 그러나 상피에르는 죄를 빨래나 건어물처럼 다룬다. 죄의 습한 기운들이 따뜻한 햇볕에 증발하고 좋은 바람에 날아갈 수 있도록 햇살이 좋고 바람이 잘 드는 높은 곳에 죄를 널어두는 것이다.
인간은 아니 모든 생물은 자신이 먹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단 한 번에 알아낸다. 그것을 가르시아 효과(Garcia effect)라고 한다.
세계가 변화하면 변화된 환경 속에서 생존해야만 하는 인간의 본질도 바뀐다. 철학적이거나 윤리적인 본질이 아니라 바로 생물학적 본질 말이다.
개껌이라도 질근질근 씹어먹고 싶은 처절한 무료함. 그것은 개도 고양이도 소도 말도 두 손 들고 항복할, 아니 두 앞발을 들고 항복할 만한 실로 대단한 무료함이었다.
그 시절 내내 내가 한 일이라고는 사무실 구석자리에서 화분처럼 조용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무려 육 개월 동안 꼬박 그 짓만 했다. 정말이지 개껌이라도 질근질근 씹어먹고 싶은 시절이었고, 있었다면 정말 씹어먹었을 시절이었다. 그저 심심하고 마냥 심심하고 하염없이 심심했다.
대표성의 잣대에 기대지 말고 개별성의 잣대로 사람을 대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국민연금, 의료보험, 종합소득세와 같은 항목에 해당되는 사람이 되었고, 세금공제, 고용호험, 주 5일 근무 따위의 뉴스에 귀가 솔깃해지는 사람이 되었다.
저는 사실 거울 속의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거울 속에 있는 제 모습을 오래 보지 않아요. 거울 속의 저는 왜소하고 볼품이 없죠. 열등감이 많은 편이에요.
이상하잖아요. 저는 왼손잡이인데 그는 왜 오른손잡이일까요? 우리는 생김새에 취향과 성격까지 똑같은데. 그래서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둘 중에 하나가 가짜였다면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둘 중에 누구 하나가 허상이라면, 그 허상은 바로 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에요. 거울 속에 들어 있는 왼손잡이는 바로 저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자이커들은 말한다.
나쁜 기억을 가지고 사는 것은 더 치명적이고 더 위험한 일이죠. 왜냐하면 나쁜 기억과 더불어 사는 삶은 지옥 그 자체니까요.
행복한 기억을 소유하는 데 성공한 메모리모자이커들은 결국 그것에 중독되어버린다. 그들이 변형된 기억에 중독되는 것은 그들의 현재와 미래가 언제나 과거보다 불행하기 때문이다. 과거는 영광과 찬사로 가득 차 있는 데 반해 현재와 미래는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차 있다. 현재는 불만족스럽다. 미래는 언제나 과거보다 더 나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버리고 결정되어 있는 과거를 고친다. 그리고 과거 속으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밀어넣는다. 그들은 더 많은 과거를 수정하기 위해 점점 파괴적인 요법도 서슴지 않는다. 그것은 2세대 메모리모자이커이 했던 위험한 방식들을 따라 하는 것이다.
무서워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시절은 없어요.
그런 시절이 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않을 거예요.
우리는 행복한 기억으로 살죠.
하지만 우리는 불행한 기억으로도 살아요.
상실과 폐허의 힘으로 말입니다.
불행은 결코 할부로 오지 않아. 불행은 반드시 일시불로 오지. 그래서 항상 처리하기 곤란한 거야.
나는 죽음이 뭔지 알아요. 그것은 시간을 입금해놓은 자신의 통장에 잔고가 하나도 안 남아 있는 상태죠. 이미 다 써버렸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차압당했거나. 별다른 건 없어요. 그저 파산한 삶을 복구할 잔고가 없는 거죠.
존재감이 한없이 작아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고 어떤 순서도 내게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호치키스나 진공청소기보다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가치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이봐, 실망하지 말라구. 인간이 된다는 것은 번호표를 가진다는 거야. 그러니 조용히 순서를 기다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그 빌어먹을 연구소에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할 일도 없는 연구소에서 내내 빈둥거리기나 하고, 바둑이나 두고,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고, 그러면서도 월급은 꼬박꼬박 받아먹고. 그런 걸 바로 버러지 같은 삶이라고 하는 거야. 무서워서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인간들. 자신이 똥을 싸놓은 자리에 무덤을 파고 눕게 되는 그런 인간들. 그런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은 고작 서른두 평짜리 아파트 한 채가 전부지.
아름답고 행복한 나는 모두 죽어버리고 이 밀리미터 나사를 돌리는 나만 지겹게 오래 사는구나.
몇 년간 백화점 정문에서 도우미를 했어요. 하루에 열 시간씩 계속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죠. 그후로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어요. 화를 내는 순간에도 슬픈 순간에도 계속 웃고 있어요. 웃음이 멈춰지지가 않아요. 엄마가 죽었을 때도 장례식 내내 계속 웃고 있어야 했어요. 눈에서는 눈물방울이 계속 떨어지는데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피어 있어요. "어서 오세요, 즐거운 쇼핑 하시구요." 하고 내 웃음은 말하죠. 그래서 내 웃음은 싸구려예요. 내 웃음은 바겐세일중이죠. 내 웃음은 언제나 할인되고 덤핑된 가격이에요. 이거 병인 거죠? 제가 이상해져버린 거죠?
저도 심토머인가요?
천국에서 권박사가 물었다.
"요즘 어때?"
"아주 나빠요. 도대체 이 섬에서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글쎄, 꼭 뭘 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냥 자네의 시간을 견뎌봐.
인생이란 그저 시간을 잠시 담아두는 그릇에 불과한 거니까."
"캐비닛처럼요?"
"그래, 마치 캐비닛처럼."
설계자들 [김언수] (0) | 2018.10.26 |
---|---|
뇌 [베르나르 베르베르] (0) | 2018.06.07 |
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0) | 2018.04.20 |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스미노 요루] (0) | 2018.04.05 |
보이지 않는 세계 [리즈 무어] (0) | 2018.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