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촌호수 벚꽃 축제
벚꽃은 꽃이 떨어지고 그 석 달쯤 뒤에 다음 꽃의 싹이 생겨나. 하지만 그 싹은 일단 잠드는 거야, 날씨가 다시 따뜻해지기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피어나려고. 즉 벚꽃은 자신이 피어나야 할 때를 지그시 기다린다는 거야.
-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스미노 요루]
4월이 시작되는가 싶더니 바로 여름이 온 것처럼 얇은 점퍼도 벗어던질 만큼 덥다. 석촌호수 한 바퀴 돌다 보면 기온을 표시해주는 시계탑이 하나 호수 중간쯤에 있는 터널 앞에 서 있다. 빨간색 디지털 숫자로 '20도'라고 찍혀 있다. 계절은 4월의 시작을 알리면서 석촌호수 전체를 설국의 나라로 만들었다. 아마도 이번 주말이 되면 벚꽃의 장관은 최고 정점을 장식할 것 같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인파는 봄에 겨울 왕국의 엘사라도 구경 나온 것처럼 하얀색 꽃잎을 보며 탄성을 지른다. 평생을 사진과는 담을 쌓고 살았을 듯한 나이 많은 아저씨의 손에서도 핸드폰 카메라는 눈부신 하얀 세상을 오려간다. 그에 질세라 여기저기 가던 길 멈추고 사람들의 카메라는 디지털 메모리 칩에 추억을 집어넣기 바쁘다. 조금 더 이쁜 표정을 담으려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는 아가씨, 비싼 DSLR 카메라로 이파리를 근접에서 촬영하는 아저씨, 점심 먹고 수다 떨며 걷는 직장인, 서울에 사는 연인들은 죄다 이곳으로 모인 듯한 젊은 커플들, 바닥에 떨어진 벚꽃잎이 신기해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만져보는 서너 살짜리 꼬마. 모두가 하얀색 세상 아래서 밝은 미소를 보인다.
그중에 특히 눈에 들어온 이는 휠체어 타고 석촌호수 둘레길로 들어온 백발의 할머니다. 여든 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할머니의 흰 머리카락 색깔과 그 위로 드리워진 벚꽃잎의 하얀색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이제는 삶의 끄트머리에서 인간이 마지막으로 가질 수 있는 색이 백발이라면, 벚나무의 하얀색 꽃잎은 4월의 문이 열렸음을 알리는 절기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늙고 병들어 집안에서 답답한 공기만 맛보았을 할머니에게 4월의 하얀 벚꽃은, 쑤시고 아픈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특효약이다. 아무리 많이 들이마셔도 중독되지 않을 향기. 그 어떤 의사의 처방도 필요 없을 만큼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석촌호수에서 마주친 벚나무에 핀 벚꽃잎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힘이 있어 저 큰 나무에서 일시에 하얀 꽃잎을 피울까. 벚나무의 꽃잎은 하나씩 하나씩 피지 않고 동시에 수많은 꽃잎을 피워 사람들에게 탄성을 자아낸다. 앙상했던 검은 회색 나뭇가지에서 불꽃놀이처럼 터지는 꽃잎들은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데 최근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일본 작가 스미노 요루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서 벚꽃에 대한 문장이 있다. 인간에게 놀라운 경관을 선물하려고 겨우내 잠들어있던 벚꽃의 싹.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으로 나와야 할 시간을 알고 있다. 때가 되면 알아서 움츠리고 있다가 한꺼번에 피어나 인간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선사하는 짧은 황금기를 살다 가는 벚꽃. 4월의 벚꽃은 빨리 사라지는 것 같지만 실은 또다시 즐거움을 주려고 작은 싹들을 움켜쥐고 잠들고 있었다는 사실. 성급하게 굴지 않고 진득하니 기다린다면 봄날에도 겨울왕국의 엘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끝으로 걷다가 하얀색이 질릴 즈음이면 노란색 개나리, 진분홍 철쭉, 보라색 진달래가 핀 석촌호수는 질릴 틈을 주지 않는다.
석촌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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