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의 날. 1년 365일 중 딱 하루, 내가 근로자라는 사실이 유일하게 뿌듯한 날이다. 아이들은 학교로 학원으로. 나는 양재천으로. 오늘도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다. 소파에서 뒹굴다가 낮잠이 들어 늦은 오후가 돼서야 나왔다. 걷기가 습관이 되려면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한 듯하다. 그대도 희망적인 것은 하루라도 걷기를 빼먹으면 왠지 저금통의 돈이 줄어드는 느낌이랄까. 걸어야 한다는 의지보다 돈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어 운동화를 신는다. 제 주머니에서 돈 빠져나가는 거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다리를 내딛지 않으면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아온 걸음 수가 줄어들어 손해를 보는 착각이 들 정도다. 이제 걸은 지 14일째다. 다행히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걸음 수는 그때그때 다르지만 뿌듯한 마음이 든다. 2주 동안 꾸준함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과연 내 몸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눈에 띄는 변화는 없다. 고작 2주 걸어놓고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욕심일까. 여전히 셔츠의 단추는 탱탱함을 유지하고 있다. 하루에 12~16km를 걷지만 튀어나온 나의 배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 정도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듯. 몇십 년을 축적해온 지방 덩어리는 그대로다. 매일 서울 도심 세 개의 구(區)에 내 발자국을 새긴다. 대중교통으로 회사와 집을 오갔을 때는 나의 자취는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버스의 바퀴이거나 지하철의 철로 된 바퀴가 내가 가는 길 위에 새겨졌을 뿐이다. 걸어 다니는 지금. 내가 지나가는 길 위에는 도장을 찍듯이 나의 흔적이 남았다. 딱딱한 아스팔트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의 마음에는 굳게 새겨진다. 한겨울 흰 눈 소복이 쌓인 곳에 발자국을 새긴 것처럼. 움푹 파인 나의 발자국은 머리에 가슴에 새겨진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퇴근길에는 걷지 않고 버스를 탄다. 내가 걸어본 길과 걷지 않은 길은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내가 아침에 걷던 길이 보인다. 버스 안에서만 봤던 길과 내 발로 보도블록 하나하나 건들며 디뎠던 길은 전혀 다른 길이라는 것을 알아 간다. 쳐다보고만 있어도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버스 유리창 안에 비친 내가 걷지 않았던 길은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했다. 컴퓨터 프린트로 인쇄한 사진이라면, 내 발로 걸은 그곳은 내 안으로 들어온 살아 있는 동네이고 길이 되었다. 울퉁불퉁 모난 길에서 발목이 꺾이기도 하고 경사진 길에서는 예전에 다친 발목이 더 아프며, 빗물 웅덩이에 신발이 빠져 찝찝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가 모르던 길에 익숙해져 간다.
며칠 전부터 선착장 비슷한 구조물을 만들던 인부 아저씨들. 이곳은 분명히 바다도 아니고 더군다나 강도 아니다. 그냥 양재천이다. 수심이 깊어 봐야 오십 센티 정도 될까. 수위가 아주 낮다. 수심이 낮은 데는 헤엄치는 잉어를 손을 넣어서 꺼낼 수 있을 정도의 깊이다. 아침에 걷다가 만난 하얀색 구조물. 설마설마했다. 배가 떠다닐 수 있을까? 게다가 이쪽의 유속은 거의 멈춤이나 다름없다. 물의 흐름이 아주 약한 구간이다. 양재천을 오가며 항상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물이 너무 느려 섞지는 않을까. 걱정되곤 했다. 물은 흘러야 깨끗하고 정화되는데. 내 입김이라도 불어서 물을 내려보내고 싶은 마음마저 들게 하니까. 아무튼 상상 이상의 것을 만났다. 영화 메트릭스에서나 사용할 헤드라인이 이곳 양재천에도 등장했다. 정말 상상하지도 못한 '양재천 투어'라니. 과연 어떤 방식으로 운영될지 흥미진진하다. 다만 한 가지 약속할 수 있는 건, 물에 빠져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 최근 인터넷 뉴스를 보고 알게 되었다. 뗏목, 오리 먹이 주기, 꽃 심기를 포함해서 양재천 '천천 투어'를 한시적으로 실시한다고.
너의 이름을 알고서,
나는 너의 줄기를 잡고 도화지에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파란색으로 물든 꽃잎을 도화지에 문지르면,
정말로 진한 파랑을 새길 것 같다.
물감을 바르지 않아도 물을 섞지 않아도 순수한 파랑이 묻어날 것만 같은.
양재천 물에 콕 찍어 땅바닥에 그리면 어떤 색깔이 나올까?
이 봄 파랑으로 물든 양재천은 다 너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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