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기 좋은 도시에 살고 있다. 감사하다.
이런 혜택은 아무나 누리지 못한다. 먼 나라 미국만 보더라도 그 나라는 차 없이는 생활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자동차의 인질이 된 것이다. 미국 도시와 주거지 대부분은 자동차 없으면 생존하기 어렵게 되어 있고, 먹을 것을 사러 갈 때도 차가 있어야 한다. 좋은 주거지에 살아도 차가 필요하고, 일자리를 구하려 해도 차가 있어야 한다. 출퇴근이나 놀러 갈 때도 마찬가지다. 그곳은 차가 없으면 속수무책이라고 들었다. 도시를 설계할 때 사람보다 자동차를 먼저 생각한 결과가 아닐까.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하며 잘 사는 나라인 미국이라도 도시의 형태는 인간 친화적이지 않다. 물론 조금씩 걷기 좋은 도시로 재탄생하는 곳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공유 자전거가 늘어나는 현상이 그것을 대변하는지도. 그래도 나는 내가 사는 이 도시가 좋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어서.
다시 내가 사는 곳으로 돌아와서 살펴보자. 내가 회사까지 걸어가기 시작하면서 이 도시의 대단함을 깨닫는다. 회사까지 걸어가기 전, 양재천은 그냥 동네 하천에 불과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 흐르는 개천 정도. 아무리 좋은 환경에 둘러싸여 있어도 그것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는 쓸모없는 존재나 다름없다. 양재천은 시간 나면 한 번 놀러 나가는 곳. 벚꽃이 피면 벚꽃 구경하러 가는 장소였다. 나는 양재천에서 극히 일부의 모습만 봐왔다. 내 두 발로 걷지 않으면 들여다볼 수 없는 것들은 세상에 널리고 널려있거늘. 굳이 양재천을 거론할 필요까지도 없이 우리 주위에는 찾아보면 걸을만한 곳이 아주 많다. 다만 걷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길이 안 보일 뿐이지 골목골목 샛길들이 아주 많다. 걸으려는 의지만 있다면 걸어서 천 리 길도 가능하지 않을까. 집에서 나와서 양재천 영동 6교까지 대략 6km. 이 구간은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길이 이어져 있다. 이 얼마나 좋은가. 그렇다고 회사까지 가는 길이 전부 순탄하지만은 않다. 마의 7km 구간이 있다. 탄천교를 건너가는 코스다. 아 정말 이 길은 피하고 싶은 길 중 하나다. 바로 옆에서는 쌩쌩 달려오는 자동차, 하늘에서는 쨍쨍 내리쬐는 햇볕. 그늘 하나 없는 곳을 뚫고 걸어야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걷는 이 길도 쉬운 길이 있는가 하면 어려운 길이 있다. 쌩쌩 달리는 자동차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산책로를 만나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봄이면 자연 식물원이 되어 주고, 인공으로 만든 냄새가 아닌 수수꽃다리의 상큼한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곳. 녹색으로 덮인 이름 모를 풀들 사이에서 수줍게 자라난 노랑, 빨강, 파랑의 한 송이 꽃을 보면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다. 내가 걸어가는 길에 살이 오른 까치들이 통통통 튀듯이 걸어 다니며, 때로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우렁찬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는 작은 현천을 보며 놀라기도 한다. 의도치 않은 곳에서 물이 콸콸콸 쏟아지면 그 자체로도 기분이 개운하다. 구정물이 아니라서 다행이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오염되지 않은 양재천에 고마움을 표한다. 몸은 고되지만 정신에는 좋은 영양분이 듬뿍듬뿍 들어와 생각도 투명해진다.
이 세상에 회사 출근을 좋아하는 직장인이 있을까? 아마도 거의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던 요즘 10km 넘게 걸어야 하는 출근길이 남다르게 변했다. 제일 먼저는 집에서 나와서 나는 항상 좌회전 생활 패턴이었다. 신호등도 없이 좌회전이 우회전으로 바뀌었다. 왼쪽으로 가는 길은 기계에 내 몸을 맡기는 길이며 자유를 박탈당하는 길이다. 오른쪽으로 가는 방향은 내가 선택하고 나의 의지로 걷는 길이다. 한 마디로 아침 출근길이 기다려진다. 회사에 가서 일하는 것이 기다려지는 것이 아닌, 산책로에 내 두 발이 올려지는 기다림이다. 내가 기다리는 버스가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 대로 짜증이 나고 버스를 놓칠까 싶어 조급한 마음이 매일 아침 되풀이됐었다.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는 누구도 타길 원하지 않으므로. 대중교통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더 이상 자신이 상황을 조정할 수 없다. 내 시간이 아닌 그들의 시간에 맞춰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버스가 오는 시간에 내 시계를 맞춰야 하고 반드시 정해진 정류장에서 하차해야 한다. 가는 도중에 "아저씨! 저 내려 주세요."라고 뜬금없이 외쳐봐야 소용없다는 소리다. 걔 중에는 손님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는 버스 기사도 있지만 아주 드물다는 사실. 버스 기사나 지하철 기사는 나의 개인 운전사가 아니다. 내가 서라면 서고 가라면 가는 사람이 아니듯이 나는 그들의 신호에 따라야 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차 버튼을 누르는 정도. 그들이 정해놓은 규칙을 따라가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다양성이 없는 생활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나에게 자유는 없다.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내 몸은 둥둥 떠간다.
그러나 내 발로 양재천을 디디는 순간, 모든 가능성은 열린다. 날씨가 선선하면 양지바른 쪽을 땡볕에는 나무 그림자가 있는 쪽을. 가다가 갈림길이 나타나면 어느 길이든 선택할 수 있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지름길이든 돌아가는 길이든. 자유는 내 것이 된다. "아저씨! 저 내릴래요." 따위의 말은 필요 없다. 내 안에서 '나는 이 길로 갈 거야'라고 정하기만 하면 된다. '오늘은 날이 뜨거우니까 조금 돌아가는 길이지만 저기 위쪽 길로 가보면 어떨까?' 이곳은 정류장도 이정표도 자동차도 없으니 내가 선택한 길이 이정표가 된다. 길이 막힐 염려도 없을뿐더러 눈으로 들어오는 녹색은 핸드폰 액정의 블루라이트로 피로한 눈을 시원하게 해 주니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라 해도 부족하지 않다.
이렇게 걸으면서 내게는 다양성과 여유가 생겼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보다 빨리 집에서 나가야 하므로 수면 시간이 줄기는 했지만, 활력은 늘었으니 그런대로 괜찮다. 장사로 치자면 남는 장사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이익을 더 창출하려면 이대로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내가 회사 출근을 걷기로 했던 첫날. 내 손엔 핸드폰과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먼저 밝혀두겠지만 나는 책을 다독하는 사람이 아니다. 대신 출근 시간 버스 안에서 짬짬이 책을 읽어왔다. 전자책도 포함해서. 그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어 읽든 안 읽든 항상 한 손에는 책을 들고나갔다. 버스 안에서 40여 분 독서로 시간을 활용했다. 내가 누구처럼 엄청 바쁜 사람이며 시간이 없어서 버스 안에서 책을 읽는 건 아니다. 평소에 책을 안 읽어 그런 시간이라도 책을 읽으려는 마음에 시작했다. 버스 안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허비하느니 나는 책을 선택했다. 대중교통에 의지하면 나의 선택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핸드폰 아니면 멍 때리거나 둘 중 하나. 그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은 하나. 책이었다. 그렇게 나는 버스 안에서 짬짬이 독서를 즐겼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건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서건. 시력이 점점 떨어지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애쓰며 책을 들고 다녔다. 그 짧은 시간을 활용해 내 몸에 좋은 습관 하나를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걷기 시작한 첫날. 책이 짐이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평소에 무겁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는데. 두 시간 넘는 걷기에 오른손으로 갔다가 왼손으로 옮겨 갔다가를 반복하며 회사까지 들고 가니 책은 짐이 되고 말았다. 걸으면서 읽을 수는 없었다. 왼손 오른손 왼손 오른손 바꿔가며 책은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 결국, 두 째날. 내 손에서 책은 떨어져 나갔다.
내가 걸으면서 잃은 것 중 가장 아쉬운 사건이다. 대신에 나는 핸드폰 전자책으로 방향을 바꿨다. 하지만 그마저도 요즘은 방해꾼이 나타났다.
"BTS 방탄소년단"
매일매일 방탄소년단 미국 공연 소식을 찾아보느라고 핸드폰에서 유튜브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버스 안에서 나이 먹은 아저씨가 방탄소년단만 보고 있자니 왠지 쑥스러워 몰래몰래 감추면서 보고 있다. 어휴 쩝! 좋은 걸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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